새벽부터 무리들이 관정으로 들이닥쳐 소란을 피워대도 그들을 맞은 빌라도는 생각해보면 나쁜 사람같지는 않다. 오히려 민란이 일어날까 전전긍긍 소심한 모습이다. 빌라도의 입장에 대해 억울하게도 사도신경이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지만, 주님께서 어디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셨나?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무리들, 죄인들, 우리들, 그리고 나 때문에 고난 받으시지 않았나?
빌라도의 관심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헤롯이라는 꼭두각시 왕이 이미 있어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별 큰 문제 없이 다스리고 있는데 백성들 중에 혹시 자칭 왕족이란 자들이 일어나서 군중을 소요시킬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 처음 물어본 것이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질문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라고 반문하시는 것 같다. 즉 정치적인, 조그만 유대땅의 자칭왕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진리의 왕임을 말씀하신다. 빌라도는 이말을 듣자 ‘뭐야, 별 문제도 아니군. 종교적인 문제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과 현실에만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라는 것 혹은 참된 것은 별 의미도 가치도 매력도 없다. 특히 ‘학술적 진리’가 아닌 ‘궁극적 진리’는 더욱 그러하다. 서울대 뱃지에 ‘베리타스 룩스 메아’ 즉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써 있어서 대학은 진리를 탐구한다고 하지만, 어차피 세상은 항상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보이기 때문에 학술적 진리는 그 한계가 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하지만, 그것 조차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결국 영원한 것 만이 진리이고 참이다. 주님은 영원한 것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군중들과 빌라도는 알턱이 없다.
그런데 나는 영원을 알고 있나? 영원은 시간적인 개념도 있지만, 그 자체로서 가치와 인격을 지니는 개념이다. 이미 1장에서 주님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소개한 요한은 18장에서 진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주님을 다시 한번 기록함으로 읽는 이들로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17장에서 주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하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하신 생명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속한 것임을 말씀하면서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진리가 우리에게 가치있다는 말, 그리고 우리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37절) 지금은 잘 보이지 않아도,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진리를 추구한다.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의 모습이 예상밖의 거침돌이 되지만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이 진리를 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관심이 주님 외의 것으로 흐트러지지 않기를 원한다.
주여,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직분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원합니다. 내가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등이어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사람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주의 음성을 듣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주님은 진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