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했는데 오늘 말씀을 보니 적어도 베드로와 요한은 안나스의 집까지는 따라간 것 같다.  그래서 요한이 이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이 본문을 수없이 읽었지만 전에는 관심없던 시간적 상황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주님이 잡히시던 때가 사람들이 횃불을 들었으니 밤이었고,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니 닭이 울었으니 이른 새벽이었으니, 주님은 피가 땀방울 같이 쏟아지는 고통으로 기도하시다가 잡힌 후 밤새도록 끌려다니면서 심문을 받으셨다.  거기다가 후에 보면 별 쉴 틈도 없이 유월절 때문에 모든 것을 빨리 진행해버리려는 사람들에게 바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좀 중간에 쉬셨으면 그래도 나았을텐데 완전히 기력을 다 쓴 후에 끌려다니시고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시고, 매를 맞고,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일을 쉬엄쉬엄하면서 스트레스도 풀면 좋겠지만, 일이 밀려올 때는 한꺼번에 밀려온다.  고통의 시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욥의 고난도 같은 날 모든 것이 발생한 것 같이, 삶의 고통의 시간은 우리의 상황을 봐주지 않는다.  주님도 대환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22)” 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심함이 상상 이상일 것을 예상하게 된다.

그 반면에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하실 때 잠을 자다가 잡혀가시자 모두 흩어진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한다. 

하나님께서 가족과 친지와 믿음의 형제들과 동역자들과 교회를 주셨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나만 홀로 있게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치 7천의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이들이 있지만 정작 싸움은 840대 1로 혼자서 해야했던 엘리야처럼.  주님에게도 제자들과 호산나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정작 밤이되어 잡히자 악한 일에는 피곤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다니면서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하신다.

그래… 믿음은 단체적인 모습이 분명 있지만 또 한면으로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내 주위 형제들이 믿음이 좋다고 내가 좋은 것은 아니고, 동시에 내가 믿음이 좋다고 (혹은 나쁘다고) 주위 사람들 역시 좋지는 (혹은 나쁘지는) 않다.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는 교우들에 대해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은 돌아볼 의무가 있지만, 항상 그것이 가능하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자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실 때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며 내 자신이 죽고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