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 중요하다고 이해는 하면서도 가끔 아니 많은 때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과 힘을 낭비한다. 단기선교를 하면서 재정보고에 대해서 그 정해진 규칙대로 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조금 그 상황에서 벗어나 보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건만 본질은 떠나고 비본질적인 것에 묶여 정해진 규칙만을 따르려고 했던,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의로운 것이라 생각한 적이 바로 얼마전에 있었다.
초기 복음이 전해지던, 특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시기에 가장 민감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새로 교회로 들어오는 이방인들에 대한 율법의 문제였다. 로마서를 읽다보면 왜 그리 율법에 별로 상관도 없어 보이는 로마인들에게 그리 율법에 대해 설명하는가 의문이 들지만, 그 문제가 깨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즉 초기 사도들이나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과연 기독교가 전혀 새로운 신흥종교(?)인가 아니면 유대교의 연장인가 하는 문제가 항상 논란이 되는 것이었다. 같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고, 예수님 조차도 율법은 폐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사도행전 15장에서는 결국 유대인 자신들도 하지 못한 것을 이방인들에게 짐 지우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을 알고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방인들에게서 자유하게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행 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행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행 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이 결정은 전통 유대교의 모든 율례나 절기나 종교적의무에 대해 이방인들에게 완전 자유를 선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매우 옳은 것이었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했다.
율법에 대해서 신약은 복음서의 '폐하지 않는다'로 시작해서 '완전케 한다' '굳게 세운다' 그리고 결국 에베소서에는 폐하는 것으로 나온다. 율법으로는 도무지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 율법 자체를 성경에서 지우는 (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 결코 지킬 수도 완성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우리의 무능함을 알게하여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지, 그것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고 선해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결론 짓는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 율법을 완전케 하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율법 자체는 참되고 선하기 때문이다.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바울은 헬라인 중 열매를 데리고 사도들이 모인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의 이방인들을 향한 사도직과 그가 받은 복음 등을 나누기 위해 다른 사도들과 개인적인 교통을 나눈다. 당시 사도들에게 바울은 좀 이질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대단한 학벌에 외국어도 몇개씩 능통하고 데리고 다니는 이들도 외국인들. 그런데 이들이 와서 복음에 대해 교통하기를 원한다. 이 때 바울의 목적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통 안에서 서로를 인정한다.
복음을 받은 우리에게 있어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종교성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더 많은 짐을 지우리라'라고 변질시켰다. 소위 '주일 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등 '종교적인' 것들을 생각해 낸 것이다.
초대 교회(이 말에 대해도 사람들마다 달리 정의한다. 어떤 이들은 로마가 국교를 기독교로 정한 후가 초대교회로 생각한다. 도무지 그런 정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믿는 이들은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놓았고, 매일 모여 떡을 떼었으며, 항상 기도했다. 그리고 주께서 제자들의 수를 날마다 더하셨다.
'내가 우리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해' '지난 번에 아무개 장로가 헌금을 10만불 했어'... 좋은 일이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감사와 겸손으로 드리는 예물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율법적인 관점에서의 십일조를 내는 것이라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율법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죄에 대한 자유, 율법과 종교와 여러 규칙과 율례에 대한 자유...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누리면 죄책감이 드는 걸까?
또 생각해보면 복음은 우리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민'을 위한 것이고 더 나아가 '만물'을 위한 것이다. 헌금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여지는 것이 더 중요하고, 이웃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0절에서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십일조만 하고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믿는 가정들을 포함해서) 돌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이제 신약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 계명은 간단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분의 모든 부요하심을 누리고, 그 누림과 생명의 풍성함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실제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이고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주님, 계속해서 종교적으로 변하는 나를 봅니다. 조금 열심을 내면 우쭐거리고, 또 조금 열심이 식으면 위축되는, 나의 어떠함으로 주님에게 나아가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시고,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변함이 없으신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나아가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물질이 있다면 그것이 당장 필요한 이들과 나누라고 내게 주신 것임을 알게 하셔서, 기회 있는대로 나눌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