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유대교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아니, ‘지나치게’ 믿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을 깨닫고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17절 18절 말씀에서 바울이 삼년 동안이나 아라비아에 머물면서 자신의 배경인 유대교 지식을 비교하며 복음이 과연 맞는 것인가 고민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지만 사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혼자 공부한 것이 아니라 사역을 곧바로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풍부한 구약 지식과 유대교 배경도 있었겠지만 주님의 복음을 접하고 나서는 중요한 것이 성경지식이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는 것임을 알았다.  복음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런 이유로 그의 사도직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많았고 더우기 과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경력이 있어서 사역에 더욱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의 많은 서신에서 그가 받은 사도직의 정통성을 변명하는 것에 적지 않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한면으로는 유대교에 속하지도, 또 기독교에 속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정통’ 혹은 ‘전통’ 속에서만 일하지 않으신다.  구약 시대에서도 선지학교에서는 별 선지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부인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의 살아계심을 ‘화석화’하고 ‘종교화’하려는 사람들의 종교성을 파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요 열심이시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종교성이 있다.  타종교나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포함하여, 혹은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그들만의 종교를 가지며 산다.  무신론이라는 종교, 과학이라는 종교 등 사람이 믿고 의지하면 종교다.  요즘은 무신론자들의 ‘교회’가 미국에서 ‘부흥’하고 있단다.  진화론 (여기서 말하는 진화론은 같은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하는 다윈의 진화설)을 신봉하는 이들은 별 과학적인 데이터 없이도 그 내용을 믿는다.  대단한 믿음이다. 

베드로가 바울을 처음 만나던 날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혹시 이놈이 우리 핵심 멤버들을 조사하고는 일망타진 하려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에 대한 의문은 조금 지나자 풀렸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토록 섬겨왔던, 육신으로 보고 들어왔던 주님의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 사랑과 임재를 바울에게서도 느꼈을 것이다.  후에 베드로 후서에서 그는 바울에 대해 쓴다.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든다.  주님의 사도들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을까?  그들은 ‘신학교’를 나오지도, 목사 안수를 받지도 않았다.  바울조차도 아나니아라는 작은 지체에게 안수를 받고 눈이 떠졌지만 (행9장) 그것은 엄밀히 사도나 목회자로서 부르심 받는 안수는 아니었다.  목회자 안수 문제를 생각하면 한면으로는 귀중한 문제지만 다른 면으로는 또한 너무 엉터리가 많아서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부정적인 면 중에 하나는 그 정통성이다.  과연 그 안수를 하는 사람과 그를 안수한 사람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주교 교황이고, 또 사도 베드로이고 또 궁극적으로는 주님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만약 안수가 그리 대단한 것이라면, 안수 받아 목회자가 된 이들은 항상 성령에 충만하고 진리를 수호할까?  안타깝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들 중에 이단으로 빠지고 타락하는 이들도 있다.  성경에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안수를 받은 기록은 내가 알기로 디모데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목회자가 안수를 받는지 모르지만, 디모데가 안수를 받은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가 교회를 섬기는 것에 대한 단 하나의 핸디캡인 ‘연소함’이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장로들이 안수함으로 그는 그 장로들과 동일함을 입었을 것이다.

나는 소위 “평신도 사역”이라는 말이 싫다.  그 말은 전통적인 목회자 사역에 비교하여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목사직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아버지가 목사고 동생이 목사이며, 친척 중에도 목사가 많고 친한 친구며 후배들도 목사 전도사가 많다.  그리고 주위에 목사 분들도 많고 페북에서도 목사님들 친구가 많다.  그리고 그 분들과 친하다. ㅎㅎ  하지만 ‘평신도 사역’과 목사 사역을 구분하여 목사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이다.  전통적으로 목회자는 소위 ‘축복권’ ‘교회 치리권’ ‘전례행사권(?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세례, 성찬, 설교, 예배 인도, 등 또 뭐가 있지?)’ 등인데, 이런 권리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설교나 예배 인도 등을 ‘아무나’ 하면 문제겠지만 세례 혹은 침례 등의 참된 의미를 인정할 때, 과연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침례를 준 사람은 매우 적다고 말한다.

물론 주님도 대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셨듯이 리더십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교회에 큰 혼란이 온다.  하지만 목회자의 권위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사울같은 이들의 사역이 막히고 위축된다면 그것 또한 큰 문제이다.  결국 주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죽였기 때문이다.  리더십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또 위로가 필요할 때 힘이 되드려야 하겠지만, 그보다 앞선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목회자에 대한 대안은 있는가? 고민 중이다. (이런 걸 내가 왜 고민해야 하지? ㅋㅋ)  그런데 오늘 말씀에 그 실타래가 보인다. 바울은 사람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고 (16절 이하) 또 그 분에게 인정 받으며, 또한 그의 회심과 사역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23, 24 절).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신학교 졸업장과 교단의 안수식으로 목회자 권위와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신앙과 신학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온전히 사역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은 뚜렷한 소명의식으로 누가 뭐라해도 사역하겠지만)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후에 만나는 여러 인물들은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일대일 교제를 통하여 온전한 사역자로 세워진다.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제국이나 나라들은 몇몇의 선택된 사람들이 계계승승 권리를 독점하고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도 시민권이 되고 피정복자들도 치리자의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는 나라들이었음을 볼 때, 가장 위대하고 또 유일하게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은 사역에 대해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아쉬운 것은 ‘평신도 사역’이라는 말에는 공공연하게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것은 선교지에 나가면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목회자가 쏟아져 나오고 더 이상 개척을 하거나 기존 교회에서 일자리를 (사역의 기회를) 얻는 것이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많은 신학교 졸업생들은 목회 안수를 받고 방황한다. 그 중에는 형편이 나아서 교수를 하는 이들도 있고, 군목같은 공무원직을 하거나, 또 나이가 좀 젊었으면 선교라도 할 것이건만, 쉽지 않은 케이스가 상당히 많다.

갈길은 멀다.   ‘평신도 사역자’를 뭐라 불러야 하나?  ‘평사’?  ㅎㅎ  그리고 그들의 위치는?  주님이 아신다…

주여~~ 오늘은 기도도 많이 못하겠습니다.  제 마음 아시죠?  ㅠㅠ  아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