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은 구약에서 말해 오던 ‘감취었던 비밀이 나타난’ 복음을 기록한 것이다.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골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비해 부피가 작아도 그 내용은 훨씬 깊고 많다.  오늘 주어진 말씀인 갈라디아서 1장 1-10절까지도 각 구절에 포함한 것이 너무 많아서 모든 부분으로 큐티를 하자면 하루 종일 걸릴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 ‘사도된 바울’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 ‘은혜와 평강’ ‘복음’ …  너무 많다.

그래서 그 중에서 선택을 하자면 내 마음에 들어오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바로 ‘복음’과 ‘교회’다.  보통 신약에서 ‘교회’라고 하면 단수(에클레시아스)인데, 오늘 갈라디아는 ‘교회들’로 ‘에클레시아이스’를 썼다 (계시록 일곱 교회에도 복수를 쓴다).  즉 한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회들인데, 갈라디아라는 비교적 넓은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바울이 경고하고 저주하는 ‘다른 복음’이 벌써 갈라디아라는 꽤 넓은 지역으로 퍼졌기 때문에 바울은 그 넓은 지역에서 돌려 보라며 이런 편지를 쓴 것 같다. 

보통 천주교에서 ‘교회’라고 하면 천주교회를 말한다.  예를 들어 ‘교회 다닙니까?’라는 질문은 ‘성당에 다닙니까?’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다른 즉 개신교 교회들은 천주교에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1517년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분열된 개신교에 대한 멸시적 표현이었던 열교를 ‘분리된 형제’로 순화했”지만 “여전히 종교(기독교)로서의 독립적 지위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한다 (위키백과).  천주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고, 천주교에도 물론 구원이 있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믿지만, 천주교에서 ‘교회’라는 뜻은 ‘성당’ 혹은 ‘천주교회’뿐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에 대해 부정하는 천주교인은 천주교인이 아니다. (ㅠㅠ)

그들의 입장에 대해 이해는 간다.  원래 천주교를 뜻하는 ‘가톨릭’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주적인 교회’라는 뜻이기 때문에, 복음을 수호하는 교회는 ‘우주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로마가톨릭 교회는 그것을 배타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도 사실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특히 ‘이단들’에게 그러하다.  예전에는 장로교가 순복음교를 이단시 했다.  하지만 200여개로 갈라진 장로교는 이제 그 가운데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하는 교회들도 생겼다고 본다.  아, 복잡하다… 큐티하다 별 생각이 다든다.

아무튼 그래서 요즘 개혁주의에 대해 많은 분들이 좋은 글을 쓰시는 것을 본다.  나는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가 마음에 든다.  순수하고 성경적이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예식으로는 침례를 선호하고 매주일 하는 (혹은 매일, 물론 현실적으로는 힘들지만) 성찬을 성경적이라 믿는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  그래서 ‘우리 교회’라느니, ‘어느 교회 다니느냐?’라느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반감이 있다.  더우기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교’등 그리고 ‘한국 교회, 미국 교회 등등’에 대해서 역시 틀린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순수한 복음은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복음은 무엇인가?  영어로 ‘가스펠’이라고도 하고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도 하는데, 즉 ‘하나님의 말씀하심’ 그리고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정말 복음이 ‘좋은 소식’일까?  뭐가 좋을까?  복음에 대해 이사야 40장 4절에서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낮은 곳은 평탄하게 되지만 오히려 높은 곳은 낮아지는 것을 말씀한다.  그만큼 있는 이들에게는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이다.  23절에서는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라고도 말씀하신다.  더우기 신약에 와서는 복음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첫째 요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을 철저히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내 손에 있는 헛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체험하며 그 분을 닮아가는 성화를 얻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 41:27)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복음과 교회는 뗄 수 없다.  순수한 복음은 하나된 교회를 이루고, 온전한 교회는 순수한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한다.  우리는 ‘다른 복음’없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복음을 받았기에 하나의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주님, 현실적으로는 이미 나뉠대로 나뉘고 찢길대로 찢긴 교회를 어떻게 하나로 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뉘지 않으셨듯이 종교적인 열심과 천당가는 소망 보다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비전을 주소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붙잡게 하소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온전한 은혜로 체험되셔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참된 복음은 만인을 하나이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나뉘어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복음, 한 교회를 묵상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