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은 왕위에 오르자 마자 자신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세에 대한 신앙이 있었고, 짧은 인생보다는 영원한 세계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피라미드 공사는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웰빙보다는 웰다잉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웰빙이라는 말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을 대표하는 말로 음식에서 주거환경 그리고 심리적인 것까지 거의 모든 삶의 부분을 아우르며 이제는 누구나 쉽게 접하는 말이지만, 요즘 실버붐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웰엔딩 이라는 말도 부쩍 뜨고 있다.  웰다잉 이라고도 말하지만 ‘다잉’이라는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서 ‘엔딩’으로 말한다.  즉 죽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마무리한다는 뜻이 된다.

흔히 하는 얘기들 중에 관뚜껑 덮을 때까지 인생은 모른다 라는 얘기가 있다.  즉 죽기 전까지는 어떤 인물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리지 쉽지 않다는 얘기인데,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희망이 될만한 말이지만 대게의 경우 한 인물의 삶은 현재의 모습에 비해 거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관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사울도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사울은 왕이 되고 나서 고통과 스트레스와 질투와 쟁투가 연속인 삶을 살았다.  항상 불안했고 피곤했다.  그는  참된 안식을 원했을 것이다.  아들 딸들이 모두 모여 미소짓는 가운데 인생을 마무리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장에서 화살에 맞고 신음하다가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옆의 병사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명했지만 그것도 되지 않자 결국 자결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엔딩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죽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머리를 잘리고 시체가 성벽에 못박히는 수모를 당한다.  하지만 여기도 끝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앞으로 받게 될 크고 흰 보좌 심판 앞에 함께 설 것이기 때문이다 (계20:11).

결국 진정한 의미의 웰엔딩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결정된다. 믿는 이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축복 속에 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있고, 비참히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으며, 복음을 전하려다 객지에서 비명횡사한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닌것은 우리에게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를 따라서 우리도 그의 부활을 좇아 따르는 열매들이 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주님, 참된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이 힘들다고 웰빙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끝을 내다보게 하시고, 그 인생의 끝을 위해 오늘 하루의 끝도 바라보게 하소서.  오늘 밤 누울 때 하루를 마감하는 것처럼, 내일 아침 일어날 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며, 매일 아침 부활절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