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놀때면 가끔 들리는 소리가 ‘That’s not fair! (그건 공평하지 못해!) ’ 라고 하는 말이다.  어릴 때 부터 다른 이들과 어울리게 되면 쉽게 부딪히는 문제가 공평성 혹은 형평성이다.  이것은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지만 가족 간에도 일어나는 문제이고 나아가서 사회 전체에서 매일 발생하는 문제이며,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역시 많은 이들이 관심갖는 문제이다.

마태복음 20장 1-16절의 말씀에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의 삯을 쳐준 주인에 대해 먼저 와서 하루종일 힘들게 일한 이들이 불평하는 내용이 나온다.  성경에 돈을 지불하거나 탕감하거나 값을 매기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많고 또 그 구절마다 의미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이 한 구절로는 공평성에 대해 이야기 하기 쉽지 않지만,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은 일이나 사역에 관계없이 은혜로 받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에 대해 말씀한 것으로 이해한다.  천국이라는 것에 대해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문제임을 상기해 볼 때, 포도원 주인은 별로 필요도 없는 일꾼들을 데려다 쓴 것 자체가 그의 은혜였음을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에 다윗은 전리품을 나누면서 그 중 악한 자들의 불평에 대해 승리의 주체가 하나님이셨음을 상기시키고 설득하면서 전리품을 모두와 서로 나눌 것을 명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율례과 규례’를 만든걸 보면 다윗은 사회보장이나 사회사업을 역사상 처음으로 실행한 사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공평하게 나누자’라고 한 사람들을 성경은 ‘악한 자와 불량배들’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믿은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교만하고 악한 자들도 다윗은 품었다는 것이다.  수중에 있는 한 사람이 아쉬워서 품은 것 같진 않다.  다윗은 정말 이러한 악한 사람 하나도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하셨다며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한다.  이렇게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일을 하는 다윗은 공동체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후에 다른 ‘쓸데없는 일’을 하나 더 한다.

함께 싸우러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얌체족’은 아니지만, 공동체에서 ‘얌체족’으로 비춰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까지 품는 것이 바로 다윗의 ‘공동체 의식’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 ‘시민권’의 원어는 영어로 commonwealth이다.  즉 일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재능이 많건 적건 지혜가 있건 없건간에 시민권을 소유하게 될 때 ‘공통으로 누리게 되는 혜택’이다.  그래서 하늘의 시민권은 은혜로 받는다.

인류의 역사상 공평함에 대한 문제가 컸기 때문에 결국은 공산주의가 나온 것 같지만 공산주의건 사회주의건 간에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유토피아는 만들어지지도 않고 누리지도 못한다.  교회는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 ‘필요한 것을 서로 통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이나 공헌에 의해 자산이나 재산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필요에 따라 나누고 통용한다.   ‘필요에 따라 나누’기만 하면 사회주의지만, ‘필요에 따라 서로 통용’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은혜받은 자들로서 서로를 배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건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서로 통용해서 쓰는 공공장소나 물품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나 막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통용’한다는 것은 모든 물건이 서로에 의해 존중되어 자신의 물건처럼 아끼고, 유물론적인 자세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청지기적인 자세로 대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고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자본주의 개념에도 반하는 것이 많다.  자본주의는 필요이상 생산할 때가 많고 그 분배는 철저히 시장에 의해 (물론 요즘은 좀 달라지기도 하지만) 이뤄진다.  그래서 많은 경우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거기에 대해 ‘공평성’을 중시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나온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은 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를 모르는 소리같이 들린다.  하지만 주님의 그 명령은 ‘천국’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한 편견이라든가, 율법의 여러 항목 그리고 여자에 대한 제한, 장로들에 대한 송사라든가 그 외 여러 가지면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러고보면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공평성의 기준은 각 개인을 존중하는 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질서와 계획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소위 ‘기득권’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이쁘게 보셔서 그들이 누리는 것을 누린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기득권’ 자체는 ‘시민권’에 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차피 그 분 자신 모두를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부요하’시다.  영원히 쓰고 써도 풍족한 분이시다.

26절 이하에 다윗은 또 ‘쓸데 없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오바하는거 아니야?’ 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다윗은 온 백성을 품은 사람이었다.  믿는 이들은 내 가정, 내 교회 (사실 이런 말은 없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아니면 내 친인척 혹은 내 민족 내 조국을 넘어 우주 전체를 마음에 품은 사람이다.

주님, 개인주의를 너무 좋아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의 관심이 ‘교회’에 있음을 보게 하소서.  내 의견을 한걸음 양보하는 것이, 양보가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일임을 알게 하소서.  나의 판단과 계산으로 공평을 정의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내가 소유한 시민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소서.  남이 잘되면 마음 깊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하시고, 아프고 힘든 일을 당하고 있다면 함께 나누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