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는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사무엘이 기록한 책은 아니다.  삼상 후반에 벌써 사무엘이 죽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죽자 사울은 무당들을 다 쫓아냈는데 아마도 사무엘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정치적 박해로 이해해도 될듯 싶다.  왜냐면 얼마가지 못해 신접한 여자를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은 황당한 일을 명한다.  전무후무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라는 주문이었다.  이것을 독창적인 모습으로 봐야할지… 그러고 보면 독창적인 것이라고 모두 좋은게 아니다.  아무튼 그는 그 일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내일 말씀을 보면 결론적으로 귀신에게 조롱만 당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만 받는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가 하는 것이다. (경상도 말로 가가가가? ㅎㅎ) 과연 사무엘이, 예수님이 나사로를 불렀듯이, 무당 하나가 이름을 부른다고 올라오는, 혹은 올라와야만 하는 그런 힘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아니면 상대적으로 그 무당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더우기 죽은 사람이 다시 ‘땅에서’ 올라오는 일이 가능한가?  (영으로 번역된 단어는 ‘엘로힘’ 즉 하나님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당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것을 기록한 저자는 그 당시의 상황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땅에서 올라온 혼령이 진짜 사무엘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사무엘’이 사울과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신접한 여인에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 것을 사울이 과연 육성으로 들었을까?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인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그것 역시 아마도 신접한 여인을 통해 말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귀신 사무엘의 하는 말이 모두 맞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처음부터 사울을 조롱하듯이 말한다.  이제 사울은 하나님에게도 버림받고 악령에게도 조롱받는 존재가 되었다…

귀신들도 주님을 보고 진실을 말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또 귀신들도 하나님을 인정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또 악한 영들 혹은 귀신들은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아는 것들도 있다.  인간의 상식으로도 미래를 점칠 수 있는 것은 많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6)’ 또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라고 말씀하시며 인간들도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하셨다.  마귀도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계 12:12)”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의 ‘사무엘’은 진짜가 아니다.  귀신과 신접한 여자가 사울을 조롱한 이야기다. 전도서 3:21에는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라고 말씀한다.  사무엘의 영혼이 땅에서 올라올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귀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대부분 헬라어로 기록되어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비교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영어 성경 킹제임스 역에서는 신구약 모두에서 보통 사람이 죽었을 때 give up the ghost라는 표현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 ghost라는 말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헬라어 δαίμων (다이몬, 영어로 demon)은 한국어 신약에서 많은 부분에서 ‘귀신’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다이몬’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한국적인 ‘귀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처녀귀신, 달걀귀신, 몽달귀신 등 어떤 형체가 있는 귀신도 아니고 죽은 사람이 귀신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형체가 있는 귀신에 대한 단어는 φάντασμα (phantom, 유령)이라는 말이 쓰였고, 이것은 주님께서 물위를 걸을 때 제자들이 놀라 자빠지면서 한 이야기이다.  어떤 떠다니는 형체를 의미하며,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귀신의 투영이다. 하지만 ‘다이몬’은 형체에 대해 별로 언급이 없다.  그냥 영만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른 육체에 들어간다.  (여러 귀신들린 자와 ‘군대’라는 귀신이 돼지떼에게 들어간 이야기 참조)

고전 10:20의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에서 ‘귀신’은 역시 ‘다이몬’이다.  즉 이 존재들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으로 변한 존재가 아니라, 원래부터 언젠가는 모르지만 존재해 왔던 몸과 형체가 없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또한 이들은 하늘의 천사 중 타락한 3분의 1도 아니다.  ‘다이몬’과 ‘천사’는 그 단어부터가 다르고 천사들은 필요에 따라 육체적 모습을 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조상숭배할 때, 즉 제사지낼 때 찾아오는 것은 돌아가신 조상들이 아니라 바로 이 ‘다이몬’들이다.  이 더러운 것들이 제사상에 올라가서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다.  신접한 무당들이 자신의 가족 중 한명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도 이 ‘다이몬’들의 농락이다.

믿는 이들이 마음이 하도 답답하다고 해서 점집이나 신접한 무당들을 찾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농락당하는 일이다.  그럴거면 아예 술마시고 잊는게 낫다. ㅎㅎ (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잠 31:7)

성경을 읽다보면 왜 부정적인 기록이 이리도 많은가 궁금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항상 순종하고 승리하고 풍성한 삶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참 좋을텐데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성경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진실이며 또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당신의 계획과 경륜을 이뤄가시는 열심을 엿볼 수 있다.

주님, 주님만을 붙듦으로, 성령에 충만함으로 다른 영에 의지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원합니다.  때론 주님의 말씀이나 인도하심이나 임재하심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을 사용하게 하옵소서.  ‘나는 믿노라’라고 선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