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기름부음 받은 믿음의 사람 다윗의 모습과 처지가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언약하신, 자신이 물려받을 땅을 떠나 주적인 블레셋 사람 밑에 들어가 살고 그것도 모자라 거짓말 하고 남들 노략질해서 먹고 사는 신세가 되었다. 내가 다윗을 따르는 6백명 중 한명이었다면 참 민망하고 한심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데 믿는 이들에게도 이런 시간을 통과할 때가 있다. 경기가 나쁠 때 그럴 수도 있고,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혹은 건강이나 그 외 다른 것에 문제가 있을 때도 힘든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다윗은 여호와께 물어봤다는 말이 없지만, 아마도 여러 고난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우울증이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힘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떤 재정적인 고통이나 육신적인 고통 등 힘든 때가 많지만 사람이 정말 힘든 때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의 가치 혹은 신분과 내 환경이 너무 차이가 날 때 정말 힘든 것을 느낀다. 그걸 영어로 status 뭐라고 했었는데 (status struggle 이었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잘 나가던 사람이 미국에 이민와서 영어를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노동직을 전전해야 할 때 느끼는 갈등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고통 당해야 하나? 왜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말도 못할 고난을 계속 당해야 했나?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그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내했나? 등을 생각해 본다.
고후 6:8-10 까지의 말씀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는 말씀을 잘 읽어보면 별로 마음이 가질 않는다. 그냥 ‘참되고 유명하고 살아 있고 항상 기뻐하고 그냥 부요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이름 없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것 같아 보이고 가난해 보이고 더우기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란다. 아… 이게 믿는 이의 삶이라니… 좀 멋들어지게 살 수는 없나?
아벨을 생각해 본다. 그는 양치는 자였는데 잘 유추해 보면 그는 양고기를 먹으려고 양을 친 것은 아니다. 육식이 허락된 것은 노아 홍수 이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죽은 그 형 가인이 풍족하게 사는 것과 비교해 그는 항상 궁핍했다. 양치는 것은 제사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 필요하면 옷을 만들어 입었겠지. 그래서 그의 삶은 모두 예배와 제사였다. 가인은 먹고 살기 위해 그의 삶을 투자했지만, 아벨은 예배를 위한 삶을 살았다. (이 말은 목회자는 아벨의 삶을 살고 평신도는 가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목회자들도 그 삶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지 않을 때 충분히 가인의 삶을 살게 된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본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주님, ‘멋들어지게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떨 때는 적과의 동침도 하게 되고 남들에게 빌어먹고 등쳐먹을 때도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큰 갈등을 느끼지만, 다시 주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회개하게 하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현재의 고난에 비길 수 없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롬 8:18)”을 바라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