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에 대해 이제 솔직히 짜증이 난다.  내가 사울이라면 이정도 상황에서는 완전히 포기하든지 아니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3천명 가지고 다윗을 치든지 했을텐데, 다윗의 말에 또 다시 자신의 죄와 과오를 인정한다.  6천개의 보는 눈이 있어서 그랬을까? 

어제 말씀에 신기했던 것은 아무리 3천명의 막강한 대군의 진영이라 해도 어떻게 광야 벌판에서 한명도 불침번을 서지 않았을까?  물론 12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군대의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역사하심 외의 이유를 찾아보자면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아마도 3천명라는 숫자의 우세 때문에 다윗이 밤에 그 안 깊숙히 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예상 못했을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쯤되자 병사들도 사울이 다윗을 좇는 일이 헛것이고 명분없는 일임을 알아차려서 헤이해졌을 수도 있다.  당시 사람들의 혹은 병사들의 일반적인 상식이나 태도가 어떤 것일지 모르지만, 많은 병사들 마음 속에  “또야? 이걸 왜 해야돼?” 라며 불평하는 이들이 많았을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숫자는 3천이라도 그들의 사기는 현저히 낮았다.  도대체 적군 블레셋도 아니고 ‘벼룩같은’ 도망자 다윗은 왜 쫓아 다니나…

그 가운데 아브넬이 눈에 띤다.  성경을 좀 찾아보니 그는 장군으로서 전장에서의 명예로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암살당한다.  다윗이 그를 선대하지만 그의 삶 속에서 그는 권력에 빌붙은 자같은 모습을 보인다.  다윗이 조롱하는 것처럼 그는 전장에서 사울을 지키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사울의 옆에 빌붙어있다.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몇몇 대형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소형 교회는 의기소침해질 수 있다.  담임목사가 영적 능력이 변변치 못해서 아직도 작은교회로 머무르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물론 교회의 부흥이 더딘 것이 지도자의 책임일 수도 있지만 과연 교회의 부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한다.

 

예전에 읽었던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책 중에서 그가 섬기던 교회가 부흥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부흥이 아니라 몸에 비계덩어리가 끼듯 단지 사람 숫자만 늘어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깜짝놀라  그의 사역을 되돌아 보고 회개하는 부분이 나온다.  마태복음 13장 33절 말씀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천국의 확장’으로 해석한 것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이 땅에서 나타나는 천국 혹은 교회의 부정적인 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출애굽기 12장 39절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 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라는 설명 외에는 누룩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씌였기 때문이다.  사실 위 출애굽기 말씀에서도 누룩을 ‘확장’의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핵심이 부풀려지고 알짜보다는 거품이 찬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은혜와 진리와 생명이 가득한 교회의 모습에 여러가지 가짜들과 이단들과 부정적인 것들이 끼어들지 않을 수 없음을 보셨고 위의 마 13:33을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주님은 그를 좇는 사람들 중에도 알곡과 쭉정이가 있고 양과 염소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교회에 다닌다고해서 모두 알곡이 아니고 양들이 아니듯이, 사울을 호위한 3천명의 병사들이 정예군 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듯이, 세상의 기업과는 달리 교회는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Youth With A Mission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의 책에서는 새로운 젊은이들이 선교에 헌신하려고 올 때 많은 이들이 동참하기 위해 참가 자격을 내릴 것을 고심하던 차에 반대로 그 참가자격과 수준을 올렸더니 오히려 더 많이 헌신하게 된 것을 말하면서 숫자를 늘리기 위해 기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격기준을 올리는 것이 바른 것임을 말한다.  복음이 값싼 것으로 전락되고 헌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 되버린 요즘 현실에 대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3)” 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내가 복음을 들을 때 과연 이러한 말을 동시에 들었던가?  복음은 싼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가치에 대해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게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부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  그런데 이론적으론 되는데 이게 쉬운게 아니다)

예전에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가 majority라고.  3천의 군사에 비해 숫적 약세에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주류’가 된다.

주님, 평생 처음으로 큰 교회에 출석하게 됐지만, 매주 보는 교인 수나 혹은 프로그램 혹은 담임 목사님의 좋은 설교 혹은 믿음 좋은 장로님들의 모습 등이 마치 나의 믿음인양 착각하지 말게 하시고, 지금 이 시간에 나의 믿음과 헌신이 주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지 상달될 수 있는지 점검하게 하소서.  사기와 목적을 상실하고 그 숫자에 연연하는  군사 중 하나가 되지 않게 하시고, 혼자 남아도 주님과 함께 하여 ‘주류’로 설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