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은 아마도 당시 사울이 왕이었고 그가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계산에 두고, 또 그 집안에도 다윗을 대적할만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가만해서 다윗을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계산이 틀린 것을 술 깬 다음날 아침 아비가일을 통해 듣는다. 아, 사울은 멀고 다윗은 가까웠지! 더우기 그의 사람들은 용사들이 아니었던가... 술을 깬 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계산 착오는 그를 열흘 동안 불안감에 쌓이게 하고 결국은 여호와께서 치심으로 죽는다. 나발적 계산착오는 나발로 살다가 나발로 죽게 한다.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로 여러가지로 계산해서 내린 결정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다. 하나님은 저기 저기 저~기 아주 먼 안드로메다를 지난 어느 은하계에 계신 것 같지만 눈 앞의 이익과 이해관계는 내 손에 잡힐만 하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이 '가까우시니라'의 뜻은 시간 상이 아니라 거리상 가깝다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깝게 계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호와를 찬양한다. 자신이 굳이 피를 보지 않고도 여호와께서 그를 치셨기 때문이다. (갑자기 손대지 않고 코풀었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ㅎㅎ) 원수나 세상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 거룩하고 의롭다 여김받은 우리를 건드렸을 때 분명 거기에 보응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이 있다. 우리를 건드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또 어떤 면에서는 주님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죽으실 때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계시록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 주님께 탄원한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계 6:10)"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히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아비가일은 다시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부잣집 사모님으로 살았던 그녀는 다윗을 섬기고 그의 종들의 발을 씻기는 천한 종으로 살겠다고 말한다. '아내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날 선대해 주겠지'라고 은근 기대했을텐데 그녀는 겸손의 극치를 보인다. 쫓겨다니는 이의 종의 발을 씻기겠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제 말씀에서 그녀가 보인 태도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다윗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말하면서 계속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기준은 여호와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지위와 용모의 아름다움과 하인들이 우러러봄과 혹은 자신의 지혜 조차도 가장 큰 기준이 아닌,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척도였다.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하는 사울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진정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도덕의 기준보다 훨씬 높은 기준의 도덕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도덕은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지만, 그를 뛰어 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세심한 기준이 된다.

주님, 가까이 계시는, 오히려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항상 인정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도전이나 서운한 상황이나, 억울한 일이나 혹은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원수를 갚으시는 주님의 손 안에서 겸손하고 주를 높이며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이 날도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이시오니, 어제만이 아니라, 오늘도 주님 안에 거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