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만 가지고는 나발의 뒷이야기에 대해 알 수 없다.  다윗이 칼을 들었지만 나중에 만나 화해했을 수도 있고 가다가 천사의 지시를 받을 수도 있고 여러가지 다른 전개가 펼쳐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뒷이야기를 알면 모를까 본문(만)가지고 큐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큐티를 주어진 본문 안에서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인 태도일 수 있다.

사무엘의 죽음으로 사사시대는 끝이 나고 이제 완전히 왕정으로 넘어가는 즈음에 나발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나발, 즉 우리 말로 ‘바보’다.  어떻게 사람의 이름을 ‘바보’로 지을 수 있을까?  본명일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는 사실 ‘바보’가 아니다.  그는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를 소유한 갑부였다.  이제껏 살고 경험해 보니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진 돈이 돈을 벌게하는 시스템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나발은 양이 삼천이고 염소가 천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계속해서 부가 늘어나는 재산과 시스템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는 (아마도 재산문제로 팔려온) 품위있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아비가일이라는 아내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발이 나름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다윗이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보낸 열명의 청년들을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첫째 그는 ‘니들이 그럴 듯하게 말하고 있다마는 너희들이 다윗의 사람이란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요즘 너희들 같이 나에게로 빌붙으려는 놈들이 한둘인줄 아느냐?’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사실 맞는 말 같다.  물론 다윗이 열명을 간택함에 있어서 신경을 써서 사람을 뽑고 또 옷도 그중 괜찮은 것으로 입혀 보냈겠지만, 다윗이 직접 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확인할 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둘째는 사울의 원수라고 소문난 떠돌이 다윗에게 도움을 줬다가 아히멜렉과 그 집안 꼴이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우기 그가 가진 부를 생각해 보면 그는 사병들도 아마도 깨나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쳐들어 온다면 맞붙어 볼만도 했다.  그는 처신을 잘했고 세상적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나발은 약삭빠른 사람이었고 그의 재산관리에 있어서는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수중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었던, 요즘으로 말하면 일자리를 창출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었고, 자신이 받은 도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그를 ‘나발’로 만들었고 나발로 살게 했다. 

말씀을 좀 더 읽어보면 그는 죽임을 당한다.  칼을 찬 다윗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치셔서 죽는다.  심한 신경쇄약증으로 죽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여호와께서 치셨다.  왜 여호와께서 치셨을까?  나발 한 인물만을 두고 본다면, 그는 분명히 다윗이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윗의 사환들을 무시하고 돌려 보내는 실수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는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그가 조금 더 지혜로웠다면 사환에게 그의 사람을 붙여 다윗의 사환임이 확실한지 확인하고 도움을 줘야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이렇게 대한 태도는 그의 큰 실수였고 그의 무지함이었다. 현재 상황만 볼 수 있는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

부자가 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론 그들은 남들과는 다른 노력과 열정으로 사업을 일구어 성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부가 과연 그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못지 않은 노력을 하지만 같은 부를 일궈내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말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여건과 상황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를 일굴 수 있는 건강이 있었고, 사회적인 자유와 여러 시스템 그리고 함께 노력한 여러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의 ‘와하하’의 설립자는 시작은 좀 고생을 했지만 꽤 빠른 시간에 한국돈 120조 규모의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그의 노력만일까?  기회도 잘 포착했고 또한 ‘중국’이라는 떠오르는 막강한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포스’라는 인터넷 비즈니스를 설립해서 어마어마한 돈으로 팔아 지금은 라스베가스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있는 젊은 부자의 성공담도 역시 미국이라는 시장과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부자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많은 큰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를 돌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부자들이 자신들의 부만 믿고 거기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그들은 하버드나 스탠퍼드를 나왔다 할지라도 무지한 자들이다.  오늘의 나발들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부를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그 재산과 시스템은 영원할 것 같지만 불과 몇십년 전 보잘 것 없던 삼성전자는 이렇게 잘 나가고, 그렇게 영원히 잘 나갈 것 같던 소니는 이제 계속 뒤쳐지고 있다.  애플이 잘나간다고 하지만 그것이 결코 영원할 수 없듯이 앞으로 몇년 후의 일을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부자인가?  지금 내 지갑과 은행 구좌를 보면 한심하지만, 다른 면으로 나는 나름 부자이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건강에 대해 아직까진 별 걱정이 없으며,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이 미국이라는 시스템에 의지하고 있고, 또한 어떤 근거없는 자신감이나 자만감이 있다.  이런것들이 나를 부자로 만든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지고는 천국에 관심을 두기 힘들고 천국을 소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진정한 부자는 만유를 소유하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 분의 풍성함을 누리고 영원히 그를 기뻐하는 자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믿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어떤 시스템으로도 얻을 수 없는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했다.

주님, 오늘의 ‘나발’이 되지 않기 원합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는 기로에서 나발로 남아있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외에 의지하고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모든 것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고, 주님과 주님이 현재 하시는 일들에 관심을 갖기 원합니다.  기도로 동역하기 원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영원을 사모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