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는precede (선행 先行, 착할 선과는 다른)이라는 말이 있고supersede (대행으로 번역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선행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말이 많다.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것이 남들이 하니까 불안해서 하는 유행같이 되어 버리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 자살률이 심각하고 그 통계를 보면 그 중 청소년 자살이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데, 좋게 들리는 ‘선행(물론 다른 한자를 쓰지만)’이라는 단어를 써서 자살률을 더 부채질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선행이라는 말이 여러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원래 어떤 것에 대해 먼저해야 하는 혹은 그것에 우선하는 등의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인프라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supersede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쓰이는데 하나는 옛것을 대체해서 새로운 것이 힘을 얻는다라는 뜻, 즉 옛날 과학 지식은 새로운 과학원리에 의해 대체된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또 다른 뜻은 그 어떠한 무엇에 대해서도 선행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즉 그 어떤 것도 뛰어넘는 절대적 기준을 말하기도 한다.
다윗은 사울을 제거할 정말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사실 그것을 기회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사울이’ 기름받은 사람 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즉 사울이라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준이 모든 것을 supersede했다.
말씀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명령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있어서 모두 외우고 지키기 쉽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다. 다윗의 측근들도 하나님 말씀을 상기시키며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라 권유하였고, 신약에서는 급기야 마귀까지 말씀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시험했다. 하지만 예수님도 다윗과 같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더 큰 supersede 하는 기준을 알고 계셨다. 즉 하나님만이 절대 기준이요 절대 선이요, 절대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택한 삼천을 오합지졸로 보이는600여 명을 치기 위해 데려간다. 전략상으로 보자면 필요 이상 터무니 없이 많은 숫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굴 속에 혼자 들어가서 자신을 노출하며 위험에 처하지만 그런 좋은 기회에 다윗은 그를 해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로 섬기고 그렇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삶에 기준을 두어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하게 하고 생존하려고 몸부림 치는 인생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을 본다.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가장 큰 계명 즉 Great Commandment 에 대해 말씀하신다.
(막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대계명은 모든 다른 계명을 supercede한다.
어떤 목사가 깊은 산속 수련회장 부흥회를 하러 혼자 산길을 운전하는 중에 피흘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을 병원에 데려주기에는 부흥회 시간이 맞질 않았지만 그 산길은 인적이 드문 길이라 그냥 두고 가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부흥회를 가기 위해 모른척 하느냐, 아니면 그냥 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어쩌면 나쁜 짓을 한 강도일 수도 있는 사람을 살리느냐. 혹시 병원에 데려가는 중에 죽지는 않을까? 결국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고 그는 부흥회 시간에 늦었다. 하지만 그날 부흥회는 제시간에 시작될 수 없었다. 정전이 되어서 불을 킬 수 없었고, 음향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회개기도를 시작하여 오히려 더욱 큰 은혜가 임하는 부흥회가 되었다. 목사가 도착하자 전기가 다시 들어왔으며 그 날 부흥회는 하나님의 크신 임재하심이 있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무던히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기회라고 해서 다 붙잡는 것은 아니고, 내 안의 더 큰 기준에 의해 기회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많은 것에 대해 비판할 수 있지만 결국 사람을 살리고 화목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어떠함이 모든 것을 supersede 한다. 사랑이 모든 율법을 supersede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말씀이 여러 상황에서 다르게 적용될 수 있겠지만, 모든 생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분을 높이며 겸손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 어릴 때는 이런 것이 좀 쉬웠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며 경험하며 하나님을 우선 순위로 삼는 것이 삶의 도전임을 봅니다. 주님, 내 안에서 밝게 비춰주시고,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며 높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절대적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항상 무릎꿇어 섬기며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된 이웃을 사랑하며 더 나아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