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 무엇보다 필수이다. 오늘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위험에서 피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다윗에게 붙는 수가 늘어서 벌써 600명이 되었다.

악인인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먹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악의 통신망이 빠르기는 하지만 (7절 & 13절), 여호와께 직접 구하여 듣는 것이 훨씬 빨라서 사울은 계속 허탕을 친다.

다윗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치리이까'라고 뭍고, 하나님은 '치고 구원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다시 한번 하나님께 아뢴다. 그러자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내려가라... 네 손에 넘기리라' 그리고 다윗은 후에 에봇을 구한다...

왜 다윗은 하나님의 육성을 들었음에도 나중에는 에봇으로 여호와의 의중을 물었을까? 사실 그 음성은 분명했지만 다윗은 그 음성에 대해 분명한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한번 더 여호와께 확인한다. 그래서 후에는 에봇이라는 조금 더 확실하고 공식적인 방법을 찾는다. 그래도 그런 모습에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에봇을 구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방법이나 여론이나 자신의 위치를 의지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제사장만 에봇을 입었지만, 이제 은혜시대에는 믿는 이들이 모두 제사장이기 때문에 참된 에봇이신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그 옷을 입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나와 다른 이들을 위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한다. 옷이 날개라고, 내가 입는 옷이 나에 대해 말하듯이 내가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분을 말하게 된다. 그 분을 나타낸다. 그리고 나는 그와 합한 자가 된다.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에봇 안 가슴판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다. 원래 우림은 '빛' 그리고 둠밈은 '온전함'의 뜻으로 Yes/No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당시는 그것으로 점치는 것처럼 사용했었다. 즉 양자택일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썼었다. 사실 많은 경우 우리가 대면한 것들은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옵션이 많으면 많을 수록 헷갈리고 하나님의 뜻은 멀어져만 간다.

(신 30: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신 30:19)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위의 말씀처럼 성경에도 우리 앞에 여러가지가 아니라 두 개의 선택사항들이 있는 것을 본다. 창세기의 생명 나무와 선악지식의 나무, 유일하신 하나님과 여러 우상들, 좁은 문과 큰 문, 영에 속한 생각과 육에 속한 생각, 그리고 새예루살렘과 불못 등이다.

성령은 우리로 우림과 둠밈 사이에서 양자택일하게 하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미세한 부분도 인도하신다. 사도행전 여러 부분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온다. 빌립을 인도하시고,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고,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또 여러 형제들에게 말씀하신다.

같은 성령께서는 로마서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고 (8:16),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8:26), 영적인 일을 분별하게 하시고 (고전 2:13), 우리를 인도하신다 (갈 5:18).

하나님의 음성은 믿는 이들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하다. 요한복음 10장 27절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나의 욕심과 불신이 그 음성보다는 우리 마음 속의 두려움과 의심의 소리를 더 크게 듣게 하는 것 뿐이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므로 나는 더 이상 우림과 둠밈이 필요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되기 때문이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주여, 분명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혹은 무시하는데 익숙해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하시고, 작은 것 부터 순종하기를 배우게 하소서. 오늘 아멘으로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시고,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구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을 보다 내용이 갑자기 바뀌어서 보니, '아 어제는 주일이라 큐티를 안했지' 생각났다. 돌아가서 어제 말씀을 보니 아히멜렉은 사울에게 다윗이 그 누구보다 충성되다고 말하지만 사울은 도엑같은 맹목적인 충성을 원했다. 살인마가 된 사울은 도엑을 시켜 제사장들을 죽인다. 정말의 악의 끝을 보는 것 같다. 도엑에 대해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아쉽게도 사무엘상에서 그 이름은 여기가 마지막이다. 하지만 시편 52편은 다윗이 도엑이 행한 악에 대해 쓴 것인데, 이렇게 한 인물, 그것도 악인에 대해 쓴 시편은 흔하지 않아서 도엑이 정말 문제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시 52: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시 52: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목자였던 다윗과 목자장이었던 도엑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인다. 도엑은 에돔출신인데 사울에게 붙었던 것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인물로 보인다. 결국 도엑은 영원히 멸망한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재물, 그리고 권력에 빌붙어 악행으로 힘을 과시하던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원히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