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절에 보니 어제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취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날에’ 즉시 다윗은 그 칼을 들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내려가 그 곳 왕 앞에 서게된다.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가드 왕의 신하들은 그가 다윗임을 알았던 이유가 골리앗을 죽인 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것 같다. 물론 다윗이 블레셋과 자주 싸웠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알려졌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 칼이 주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다윗의 예상과 기대가 자세히 어떤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칼을 소유한 것이 오히려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모세의 경우처럼 내가 의지하던 지팡이의 본 모습이 사실은 나를 해할 수 있는 뱀일 수 있듯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오히려 나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한 것은 당시의 ‘민족’ 개념이다. 우리 말 ‘민족’이라는 것은 유럽 문화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이 만들어낸 한자어라고 한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민족이라는 말이 없었고 ‘족류’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우리 말 성경이 번역될 때도 역시 이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8:19절의 ‘모든 민족으로’에서 민족은 ethnos라는 말로 영어의 ethnicity (종족)의 어원이다. 즉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씨족 사회의 집단까지도 뜻하는 단어일 수 있다. 말이나 생활 양식이 다른 집단의 개념이다.
당시 블레셋과 이스라엘 민족은 얼마나 달랐을까? 물론 다곤을 섬긴 블레셋과 여호와를 섬긴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차이는 있지만, 과연 얼마나 생김새나 옷차림이나 언어가 달랐을까? 블레셋의 기원에 대해 정확한 것을 찾기 힘들지만, 싸울 때 통역을 두었다는 언급도 없고 (물론 이것은 자연스럽게 기록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나중에 블레셋 사람들 끼리 서로 쳐죽였다는 기록을 볼 때 생김새도 히브리 사람에 비해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더우기 고대사회에는 국경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섞여 살았을 가능성도 많다. 사실 ‘히브리 민족’이라는 개념이 우리같이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 종교적 개념이기 때문에 어떤 민족적 사상은 희박할 수 있겠다.
그런 이유로 가드 사람들은 다윗을 맞을 수 있었다. 가드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보고 있었고, 아마도 그의 빛나는 전적과 현재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자신들 편으로 들어오게 하면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민족’의 개념이 뚜렷한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실력있는 외국인이 ‘귀화’해서 일본식 이름만 가지면 그의 배경은 전혀 문제삼지 않고 일본인으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은 가드가 결코 그의 거처가 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미친척한다. 미친 왕이 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왕족(royal)이라고 한다. ‘왕같은 제사장’ 즉 왕권과 제사장권을 동시에 가진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왕의 신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신 차리지 않고 미친척 하거나 세상에 미쳐있다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미쳐도 잘 미쳐야 한다고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미친사람이라고 하는데, 요즘 내가 미쳐있는 것은 있는가? 지식에 미쳐있는가? 음악에 미쳐있는가? 사랑에 혹은 사람에 미쳐있는가? 주님께 미쳐있는가? 아니면 세상에 미쳐있는가? 아니면 미친 척 하는가?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미친 사람이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3)” 그는 미친척한게 아니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해 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미친 사람들이 필요하다.
주여, 한 때 주님을 위해 미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 마음이 불탔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 관심 모두가 주님께 쏠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 다시 미치기 원합니다. 미친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온전히 미치게 하옵소서. 내 마음과 관심과 삶의 목적이 주님 되게 하옵소서. 무엇을 하던 주의 영광을 위해 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