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41절의 ‘서로 입 맞추고’라는 부분이 좀 한국 문화와는 거리감이 있어 생각해 보았다. 요즘은 ‘키스’라는 것과 그 유형에 대해 너무도 성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거리감이 있는지 모르겠다. 히브리어 nashaq 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구약에서 35번 나오고, 남녀 간의 키스에서도 물론 사용되었지만, 많은 경우 가족간 입맞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호세아에서는 송아지에 입맞추는 것도 나온다. (그러니 소위 '프렌치 키스'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ㅋㅋㅋ)
사실 중동지방에서 키스는 인사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가족 친지 혹은 친구들 간의 친밀함의 표시로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한다. 프랑스에서도 그렇게 하고, 브라질에서도 그렇게 한다.
신약에서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 마지막 부분에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한다.
(롬 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고전 16: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살전 5: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위의 ‘입맞춤’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Philéma’인데, 이 말은 ‘형제사랑’을 뜻하는 단어phileó를 그 어원으로 둔 단어이다. 즉 형제 사랑하는 표현으로 입맞춤을 한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어릴 때부터 교육 받아왔지만, 정작 사회에서 각 사람의 거리감은 꽤 크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물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는 하지만, 얼싸안으며 서로를 맞이하는 이들도 극히 제한되어 있고, 친지들 사이에서도 입맞추는 것은 금기사항이요, 오히려 가족 간에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뽀뽀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접촉결핍증인지 아이들에게 뽀뽀를 많이 하는 편이다. 큰 놈이 한국 나이로 16세인데 아직도 나는 틈만 나면 볼에 뽀뽀한다. 피하는 척 하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다. ㅎㅎ 물론 막내는 시도때도 없이 뽀뽀한다. 뽀뽀하고 조금 후에 ‘5분 지났어. 또 뽀뽀해’한다. ㅋㅋ 아내는 아침에 일 나올 때 뽀뽀한다. 뽀뽀하면 아이들에게 화내고 핀잔줬던 것도 사그러드는 기분이다. 가족 간에는 항상 뽀뽀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런데 정작 나를 입맞추는 분은 따로 있다. 그 분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죄짓고 실패하여 형편없이 돌아온 탕아에게 그 아버지는 입맞추신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버지 하나님은 내가 깨끗하거나 더럽거나 냄새나거나 관계없이 '달려와 나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신다.
성경은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께 입맞추라고 한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2)” 유다는 배반의 입맞춤으로 예수를 팔았지만 (눅 22:48) 나는 옥합을 깨뜨리고 그 발에 입맞추는 여인의 심정(눅 7:38)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원한다.
다윗은 세번 절한 후 요나단과 서로 입맞추고 헤어지는데, 다윗이 더욱 크게 운다. 다윗보다 아마도 요나단이 나이가 더 많고 또한 왕자의 신분이고 또 헤어지는 입장이라 다윗은 그렇게 세번이나 절했던 것 같다. 다윗은 요나단을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입맞춤은 이제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슬픔의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입맞추는 것은 기쁨과 환희의 입맞춤이다. 죄인인 나를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영접하시는, 받아주신다는 입맞춤이다.
오, 주여. 나를 입맞춰 주세요. 나를 사랑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