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 즉 부모나 선생 혹은 영적 리더의 인품이나 속내를 알게되고 실망하게 되면 그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나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의 권위나 자존심을 세우려고 처세하는 태도임을 알게 되면 슬플 정도로 실망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보여지는 많은 부모의 모습이다.  오늘 사울은 그러한 면을 보여준다.

고대 이스라엘의 말투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울은 다윗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고 그를 ‘이새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심한 말로 ‘개똥이집 막내 새끼’다.  요나단은 혹시라도 아버지가 다윗에 대한 마음이 변하진 않았을까 해서 여러 가지로 힘쓰고 있다.  사울이 다윗의 행방을 묻는 말에 요나단은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얼버무렸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책임을 지고 다윗을 위해 대변한다.

그 때부터 사울은 소위 ‘역가정’ 아버지의 면모를 모두 보여준다.

첫째 그는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언어 폭력을 휘두른다.  요나단을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이라 부르며 자신의 아내를 아들 앞에서 욕하며 동시에 그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한다.

둘째 그는 요나단에게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고 한다.  아들 요나단의 생각과 인격과 의견은 안중에도 없고 마치 ‘내가 널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그의 다음 행동으로 거짓임이 드러난다.

세째 요나단이 정당하고 논리적인 그의 답변을 요구했을 때 그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자신의 아들을 오히려 죽이려고 까지 한다.  여기에서 그의 모든 위선이 드러난다…

아 주여, 이것이 내 모습이고 내 주의 사람들의 많은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권속 (가정)에게 사울과는 완전히 다르게 대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7)” 이것은 오직 그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고 맏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의 형제된 모든 믿는 이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  예수님은 ‘독생하신’ 아들이시지만, 이제 더이상 외아들이 아니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하고 기뻐한다’ 남자건 여자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없어질 인간과 인간의 나라가 아닌, 주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 원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그리고 그의 나라는 영원하다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단 7: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단 2: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마지막으로 사단은 죽이지만, 하나님은 살리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버지의 본체이신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먼저 제자가 되지 않고는 제자 삼을 수 없다.  훌륭한 부모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먼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는 참된 부모가 될 수 없다.  학부모를 위한 많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결국 먼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이지 않고는 ‘널 위해 이러는 거야’라는 위선과 속내가 드러나게 된다.

주님, 부모들도 많은 염려와 스트레스가 있지만 아이들도 그에 못지 않은 도전과 peer pressure와 스트레스가 있음을 이해하게 하소서.  그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의 모습의 본을 보이게 하셔서, 짜증내는 말투나 비판하는 말투 혹은 정죄하는 말을 그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도록 오늘 성령에 충만케 하소서.  먼저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하지 않고는 나의 어떠함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음을 압니다.  주여, 다음 세대인 이 새로운 선교지로 우리를 보내셨사오니, 나로 자녀들을 섬기며 먼저 선 형제로서 본을 보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