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큐티 제목은 ‘사랑은 사람을 품고 질투는 분을 품습니다’이다.  매우 멋진 제목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다시 사울이라는 인물에 주목한다.  아마도 사울은 다윗보다 나와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왕이라는 배경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매사에 당당하다.  하지만 정작 사울은 이스라엘의 작은 지파 베냐민 별 볼일 없는 출신의 사람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매사 위태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무리가 돌아올 때 여인네들이 다윗과 사울을 비교하며 사울은 천천 (즉 백만명) 그리고 다윗은 만만 (즉 1억명) 을 죽였다고 노래했을 때 사울은 분노하며 바울이 자신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 남자들에 있어 여자들의 칭송은 치명적이다. (ㅎㅎ)  오빠 부대가 와서 오빠~ 를 외쳐대기 시작하면 당사자는 물론이요 듣는 이들에게도 그 영향은 치명적이다.  자신과 남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비참해 지는데, 사울은 그 독사과를 집어먹고 있다.

믿음 생활에서 큰 독은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데 있다.  세상적인 것은 물론이요 영적인 것도 비교하면 할 수록 감사보다는 비참해진다.  남의 떡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바울을 통해 고후 12:9에서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시고 바울도 딤전 6:6에서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고 말함으로 공동체 삶에 있어서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말씀한다.

그런데… 목회자들의 학력세탁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03

위 아티클이 얼마나 믿을만한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과거 못살고 배고픈 시절 끼니도 어려운데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목회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데 왜 목회자들이 학력세탁을 할까?  복음만 가지고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거짓으로 포장을 한다.  아티클 뒷부분에 목회자들은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학력’ 아니면 ‘영력’이다.  특히 ‘경건의 능력’이다.  신학은 제대로 마치고 아는 것은 많지만 정작 무릎으로 목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심각할 수 있다.

목회자들은 왕이 아니다, 그리고 왕 조차도 그들만의 고민이 많다.  사울도 오늘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왕좌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서로 형제로 살기를 원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왕정을 싫어하셨고, 새로 시작하는 왕국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 임금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기를 원하셨으며, 그것은 왕 혼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및 여러 돕는 이들과 더불어 왕국을 건설하기 원하셨다.  하지만 사울은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하려고 하니 불안해지고 또 질투할 수 밖에 없다.

난 서태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노래도 잘 못하고 춤도 별로다.  거기다 백매스킹까지 반기독교적이라고 하니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그에게서도 배울 점은 있는데, 그러한 핸디캡도 불구하고 소위 ‘하이퍼스타’가 된 배경은 그가 혼자하지 않고 ‘아이들’이란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춤을 잘추고 노래 안무 등을 분담해서 담당하는 그 친구들을 잘 활용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음악은 한국 가요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 16:8)”라고 말씀하신다.  과거에는 거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에 의해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 그 지혜를 비기독교인들이 배우고 오히려 더 잘한다.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서 배워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자랑하고, 교인들은 목회자들의 달란트에 대해 오빠 부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겸손과 열심을 후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

주여, 내 안에 숨겨진 사울의 그 고민이 해결함 받기 원합니다.  복음만을 가지고도 그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기 원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받은 한 달란트로 다섯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배를 원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나의 약함을 인정하면 그 안에서 더 크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믿는 이들이 마음을 합하여 일함으로 “…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엡 3:10)”  하여 주옵소서.  주의 종들이 여인네들의 칭송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시고 오로지 주의 인도하심과 후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만을 위안 삼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