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큐티 말씀은 마치 드라마의 도입을 지나 전개 부분같아 흥미 진진하다. 드디어 다윗이라는 인물이 왕궁이라는 환경으로 옮겨지고 그 이유는 사울왕이 악령의 괴롭힘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신분열증 내지는 심한 우울증 정도로 진단받고 약물치료를 하겠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evil spirit)’이 그 이유라고 말한다.
영어 단어 중에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은데, 그 반대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기 애매한 단어도 꽤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정신精神’이라는 단어일텐데, 영을 spirit으로, 혼을 soul, 마음을 heart, 생각을 mind로 번역하면 어떤 내적인 것을 가리키는 정신에 대해서는 마땅한 영어 단어가 없다. 영어 사전에는 mind spirit soul 혹은 consciousness라고 번역했는데, 그나마 consciousness가 그래도 제일 가까운 것 같다. 그 원래의 뜻은 ‘깨끗한 신(귀신으로 번역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각으로 번역될 수도 있겠다)’일텐데, 우리가 흔히 ‘정신차리자’라고 할 때는 ‘의식’ 혹은 집중의 뜻으로 사용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총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어쨌거나 이 ‘정신’은 심리학하고도 연관이 많아서 원래 ‘혼’을 나타내는 말인 psyche의 어원을 가진 심리학 (psychology)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보통 ‘혼’이 아닌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psychoanalysis라는 말을 정신분석이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정신’이라는 말은 ‘혼’에 가깝다고 하겠다. 사울은 이 ‘혼’에 문제가 생기고 다윗에게 음악치료(Music Therapy)를 받고 있다.
기독교내에서 이원법 혹은 삼원법이라고 해서 인간을 영과 육 둘로 나누느냐 아니면 영혼육으로 나누느냐에 대해 말이 많지만, 성경을 보면 분명 영혼육 세 부분으로 나온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이러한 삼분법에 대해 혹자는 구원파의 영향이다 혹은 중국 워치만 니의 영향이다라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삼분법은 이미 그 훨씬 이전부터 회자되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세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은 ‘이분법’ 혹은 ‘삼분법’이라는 말로 각 부분을 나누고 분석하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삼위일체라는 말도 성경에는 없지만 그 내용이 결국 말하는 것은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의 삼위가 ‘구분’은 되지만 나눌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과 육을 나누면 ‘사망’이다. 육과 혼을 나누면 정신병자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재미있게도 영과 혼은 나눌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아니,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에 대해 집요하게 말씀하는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4:12)라고 하면서 믿음이 단지 멍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의 것이 아니라 분명 우리 안에 격정을 일게하는,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다고 피력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부딪힐 때, 우리의 영과 혼이 나뉘어지고, 관절과 골수가 쪼개진다는 말인데, 이 말을 보면 재미있는 것은 영과 혼을 얘기하면서 관절과 골수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관절은 뼈와 뼈를 연결하는 것이고, 골수는 뼈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것이다. 관절은 뼈를 붙어있게 하지만, 나눌 수도 있는 부분이고, 골수는 언뜻보면 뼈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부분이라 나누기 꽤 힘든 부분이다. 이와 같이 영과 혼도 나누기 힘들지만, 나눌 수 있고, 또 나누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 성경에 ‘영혼’이라는 단어를 찾아서 영어 번역과 대조해 보면 모두다 ‘soul’로 되어 있다. 베드로 전서 2장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이라는 말씀에서 ‘영혼’은 원래 ‘혼’이다. Beloved, I urge you as aliens and strangers to abstain from fleshly lusts, which wage war against the soul. 왜 우리 성경에서 ‘혼’을 거의 모두 ‘영혼’으로 번역했을까? 아마도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 이 ‘영’과 ‘혼’은 섞여 있기 때문에, 혹은 섞여 있는 것으로 의식되어서 그냥 ‘영혼’이 되었다.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spirit이라는 말에 매료되어 있는데,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죽은 영’이지만, ‘영혼’으로 섞인 존재이기에 뭔가 신비한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종교에서도 신비한 체험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영혼’을 ‘영’과 ‘혼’을 나누어야 한다. 다시 히브리서로 돌아가서,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 바로 뒤 구절에는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여기고 생각하는 것들이 나중에 드러날 것인데, 결국 결산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왕이라는 자리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사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선택받고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어쨌거나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적인 문제의 발생으로 그의 위치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러면 ‘뇌’는 무엇일까? 무뇌아에게 혼이 있을까? 영이 있을까? ‘뇌’가 혼일까? 약물 치료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만약 사울에게 약물을 주는 마법사가 있었다면 그의 위치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있을까? 참으로 오묘하다.
그래서 영혼육은 따로 나누어 이해하기 힘들다. 모두 우리안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이지만, 시간 안에서 우리의 체험은, 처음 영의 구원, 그리고 혼, 마지막으로 육의 구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오늘을 사는 나는 이미 받은 나의 영의 구원으로 인해 이 하루를 살면서 나의 생각과 마음과 기질이 조금 더 주님의 어떠함으로 변함받고 그 분의 부요함을 누리는 혼의 구원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그 날 나팔이 울릴 때 썩을 몸도 변화되어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구원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하루 성화되는 점진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이미 이루신 주님의 역사하심 안에서 그 완성된 구원을 미리 보는 것이기도 하다.
주여, 오늘 내 안에 숨어있는, 혼합되어진 영과 혼을 보게 하시고, 성령의 검, 주의 말씀으로 나누시고, 분명히 밝게 비춰주시어, ‘좋은 모양’ 뒤의 숨겨진 내 자신의 비참함을 보게 하시고, 오직 주님으로 돌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