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 지폐를 찾아내는 사람들은 위조 지폐를 감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권(진짜 지폐)을 계속 만지고 들여다 보면서 연구하는 가운데 그것과 다른 것을 분리하는 훈련을 통해 위조 지폐를 감식한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권이 많이 있을 때이고, 진권은 별로 없고 위조 지폐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진권에 대한 인식이 쉽지 않다.  더우기 어떤 경우 진권 종이는 남겨두고 그 위의  액면을 상위권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요즘 새로 나온 신권같이 확연히 다른 재질이 아닐 경우 감식이 쉽지 않다. 안타깝게도 진리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분별의 영이 필요하고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안목 또한 필요하다.

오늘 큐티의 제목이 ‘믿음의 가문’에 대한 것이다.  제목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으면 마치 사울의 가문이 믿음의 가문임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해설을 읽어보니 사울의 가문은 믿음의 가문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해설에서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사울의 가문을 믿음의 가문으로 오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문’이란 무엇일까? 이 단어는 꽤 독특한 단어이다. 국어사전에는 “가족 또는 가까운 일가로 이루어진 공동체. 또는 그 사회적 지위.”라고 되어 있고, 특히 영어로 무엇으로 번역될지 궁금해서 사전을 봤더니 단지 ‘one's family’라고만 되어있다.  실망이다.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가족’이란다. 하지만 그 밑에 ‘noble family’라는 말이 있고 그 것은 ‘귀한 가문’으로 되어 있다.  사실 우리 나라 말의 ‘가문’이 주는 느낌은 ‘noble’이라는 느낌이 포함되어 있다.  즉 ‘양가집 규수’ 같이 ‘양가집’이라는 느낌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그 뜻을 보니 ‘또는 그 사회적 지위’라는 말 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가문'과 ‘믿음’이 약간 oxymoron (날카롭고 무딘, 모순)같이 들린다.

대개 ‘믿음의 가문’을 얘기하면 사위적 지위가 있는 장로님 가정에 자녀들도 문제 없이 공부 잘하고 잘 자란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러한 예를 드는 경우가 많다.  아… 그럼 그렇지 못한 가족들은 믿음의 가문이 아니란 말인가? 변변치 못한 직업에 재정적으로 힘들게 살면서도 믿음을 지키려고 바둥거리며 아이들이 문제아 기질이 있어도 하나님께 아뢰는 가정들은 믿음의 가문이 아닐까…?  ‘가문’이라는 말에는 다분히 귀족적인 어감이 있다.

신약성경에서 ‘가문’으로 인식될 수 있는 집안은 아무래도 예수님 가족일 것 같다.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어차피 유대인들 위주의 교회이고 특히 예수님 가족과 친척이 중심이 되었었다.  그런 이유로 큰 문제가 없지만, 나중에 그 교회는 흩어지게 된다.  그 후 안디옥에 교회가 생기면서 유대파와 헬라파로 나뉜다.  재미있는 것은 유대파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의 다수가 이방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바울이라.”(행 13:1) 즉 유대 가문들은 더 이상 주류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문’이라는 말 보다는 ‘권속(한집에 거느리고 사는 식구)’ 이라는 말이 더 좋다. 가문이라는 말이 약간 배타적인 느낌이 있는 반면, ‘권속’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모든 이들이 교회라는 한 집 안의 식구임을 말해준다.  마태복음 12장 50절에서 주님은 자신의 친인척을 특별한 사람들로 대우하지 않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시며 ‘좋은 배경’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신다. 바울도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 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믿음의 ‘가문’이 아니라 믿음의 ‘권속’임을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데 교회는 과연 ‘권속’으로 있는가? 이 권속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면 무언가 발견하게 된다.

이 믿음의 권속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포도나무의 비유에 있는데, 주님께서는 왜 당신을 가리켜 ‘나는 포도나무요’ 또 믿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을까?  다른 나무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포도나무일까?  감람나무, 무화과나무에, 석류나무, 더군다나 그 크고 아름다운 ‘가문’과도 같은 성전의 기둥으로 쓰이는 백향목 나무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포도나무일까?  열매가 열려서?  감람, 무화과, 석류도 열매가 열린다.  단 하나 차이점은 다른 나무는 ‘나무’인데 포도나무는 ‘덩쿨’ ‘줄기’라는 점이다.  즉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무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줄기인지 언뜻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바로 주님의 줄기이고, 그분의 뻗어나감이다.  우리는 단지 축복의 ‘통로’가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뻗어나감이다.

교회 내의 특별한 가문이 교회의 ‘기둥’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