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큐티는 참으로 헷갈리는 내용이다. 바로 전에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위가 폐해졌음을 선포하고 그를 떠난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지도자가 갈린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면에서는 사울이 아직은 왕으로 남아있고, 다윗이 새롭게 왕이 되고 난 후 온전히 왕노릇할 때까지도 아직은 한참 더 남았다. 사무엘과 사울의 분열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600명이나 (이들은 알지도 모르겠다) 사울을 따르고 있다. 용감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있기 때문인지 이날 심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승리한다.

아.. 이 얘기는 참 이상하다. 하나님이 사울에게서 떠났다면 그냥 사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아들을 포함해서) 모두 깨끗이 패배하고 바로 다른 왕권이 들어서야 했다. 그래야 백성들이 헷갈리지 않고 다음 왕을 모실텐데, 이제 얼마있지 않으면 다윗이 등장하고 골리앗을 이기고,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하면서 더 큰 분열과 혼란을 몰고 온다. 큐티 제목대로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면 왜 하나님은 이 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허락하셨나? 일본의 속담 ‘적은 내부에 있다’라는 말처럼 외부의 위협보다는 내부의 분열이 더 심각한 것인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나?...

이 이야기는 마치 신약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갈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완전 다른 상황이기는 하지만,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 15장 39절의 말씀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라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도행전에서는 바나바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들어 성령은 바울을 택했다 라고까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이 문제의 배경을 보자면 마가라는 인물이 있고, 그는 바나바의 조카이다. 즉 바나바가 다른 이들을 제치고 자신의 친인척 배경의 젊은이를 택한 것에 대해 바울은 못마땅해 했고, 바나바는 그런 바울이 못마땅해서 피차 심히 다투어 갈라섰다. 아… 이렇게 리더들이 갈리는 경우 다른 믿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그런데 조금 더 읽어보면 늙으막에 바울이 마가를 의지하는 장면이 여러번 나온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벧전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깊이 연구하지 않아서 위의 마가가 모두 같은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던 마가에 대해 바울은 이제 많이 풀리고 오히려 많은 사랑을 베풀고 세워준다.

교회가 분열될 때 아름답게 분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름다운 나뉨은 분열이 아니라 요즘은 birthing이라고 말하며 세포가 분열하여 두개로 나뉘듯 성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름답지 못한 분열이 될 때는 양방의 태도가 시퍼런 날처럼 기새등등하다.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 순교의 각오까지 한다. 그리고 나뉜 뒤 양쪽 모두 성장에 힘쓴다. 만약 성장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상황이 나빠지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뉘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본다.

종교개혁을 이룬 루터도 자신의 입장은 천주교를 떠나지 않았었다고 기억한다.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분리되어 나온 것은 개인적으로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개신교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였음을 볼 때 루터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된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경우도 끝까지 자신이 성공회의 신부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어제 ‘관계의 영성’을 끝냈다. 마지막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모던(근대)시대에는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중시했고 (거기에서 자유신학이 나왔고) 하나님을 분석하고 정리하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시대에서는 이제 신비를 추구한다. 더 이상 하나님을 어떤 틀이나 교리나 분석 안에 가둬두지 않는다. (교리는 중요하지만) 저자의 그러한 해석을 모두 이해하고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 핵심으로 얘기한 내용 즉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있는 분이 아님은 확실하다라는 말에는 완전 동의 한다. 그는 ‘거룩하신 분’이다. 즉 우리의 이성과 상상과 차원을 넘는 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힘써 알아야 한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래서 오늘도 큐티를 한다. 분열의 중간에 서서 분노도 하고 절망도 하고 짜증도 내고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나의 이성과 이해를 뛰어 넘는 그분의 어떠함이 있음을 배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지할 것은 왕이나 목회자나 리더가 아니라 주님 한 분 뿐임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