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야 항상 좋지만, 지난 주 성가대(찬양대? 성가대라는 말을 요즘은 안쓴다고 한다, 아마도 일제 시대의 단어?) 찬양도 매우 좋았는데, 그 이유는 찬양 가사가 개인적으로 좋았기 때문이다.  성가대의 찬양은 보통 ‘음’과 ‘하모니’에서 은혜를 받는데, 지난 주에는 가사에서도 은혜를 받았다.  정확하게 생각은 나지 않지만 가사 처음이 주계신 곳에 우리가 있게 하소서라는 내용이었다.  보통 우리는 기도할 때 ‘주여,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거나 혹은 ‘주여, 우리와 동행하여 주소서!’라고 하는데, 그 찬양 가사는 우리가 주계신 곳에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때부터 하나님은 이미 그의 백성 가운데 장막치시고 항상 동행하신 분이었다. 이사야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요한 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시면서 ‘거하시매’ 즉 ‘장막치시는’ 분으로 말씀하신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쉽게 얘기해서 주일 예배때 우리 마음, 우리의 관심 모든 존재가 하나님께로 향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자발적으로 따르는가 라고 질문해 보면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오늘 큐티를 보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사울과 동행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싫어하는 것을 본다.  특히 백성의 지도자인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이 어리석게 (망령되이) 행동한 것을 보고 사무엘은 사울의 왕위가 폐위됐음을 말한다.  아..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한 나라의 지도자야 말할 것 없지만, 한 가정의 리더인 남편 혹은 아버지 또한 얼마나 중요한가?  아이들은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된다고 하는데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가 계신 곳에 있기를 즐겨하는 삶을 보여줬는지 모르겠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면서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리하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아…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 말씀인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착한 일을 많이하고 종교적으로 열심인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다.  주님 계신 곳에 있는 삶이다.  주여, 나의 마음을 돌이키시고 내 마음이 주와 동행하며 주 계신 곳에 있기를 즐거워 하게 하소서.  주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