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의 원인을 살펴보면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왜 이러한 상황이 닥쳤을까? 세계정세, 불경기, 과학기술의 발전 등 여러 외부 요인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내부적인 원인도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45절에는 귀신 나간 사람에게 후에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오게 되는 형편을 말하고 있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베드로 후서에는 그와 비슷한 말씀이 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 즉 그 이유는 다시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비어있는 집'임을 말하고 있다.

오늘 큐티의 제목은 '위기 때 드러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각도로 보고 싶다. '위기를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인가'이다. 전에 의학계에서는 '병을 고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지만 현재 의학의 가장 큰 촛점은 '예방학'이다. 즉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병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 블레셋 군대는 어마어마하다.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백성 즉 예비군은 해변의 모래보다 많다. 그런데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마치 바이러스가 우리 몸 밖에 아무리 많아도 위기가 되지 않는 것 처럼 그들의 거대함 자체는 위기가 아니다. (약간 cheating을 하자면 후에 블레셋은 서로 싸워 죽인다) 어린 요나단이 겁없이 수비대를 친 것 조차 근본적인 위기가 아니다. 근본적인 위기는 수비대가 이미 이스라엘 지경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즉 바이러스가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 속에 들어와 진을 치고 있다. 이러한 경우 살아있는 몸이라면 요나단처럼 항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당연하다.

어떻게 블레셋이 이스라엘 지경 깊이 수비대까지 두게 됐을까? 조금 더 읽어보면 당황스런 얘기를 접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대장장이를 두지 않게 아예 손을 쓴 것이다. 즉 이스라엘에 대장장이가 있어 혹시 칼이나 철기를 만들까봐 대장장이를 허락하지 않고 철물이 필요할 때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야 얻을 수 있게 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는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이 있었다.

이것은 심각한 이야기이다. 일제시대를 떠 올리게도 하고, 조선 말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을 프랑스로부터 지키지 못한 얘기도 생각나게 한다. 자신을 지킬 힘을 잃어 버린 이스라엘 민족. 결국 그 원인은 두 가지 이다. 첫째는 힘 자체가 없는 것이고 둘째는 적은 부분일찌라도 적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 둘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믿음을 버린 것이다. 한번 믿음을 버리면 두번째 버리고 포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기에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같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하는 것도 뚜렷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살며,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을 먹고, 같은 문화 속에서 영향을 받을 지라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겨쌈을 당해도 우그러뜨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We are hard pressed on every side, but not crushed;" (고후 4:8)

주여 오늘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재확인 하게 하시고 내 자리 작은 것이라도 원수에게 내어주지 않게 하소서. 내 몸이 항체를 만들어 내듯, 내 영적인 부분에서도 즉각적으로 항체를 내어서 그 어떤 조그마한 틈이라도 원수에 내어주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누릴 때에도 주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욥이 그랬던 것 처럼 항상 주 앞에 돌아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