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오늘 그의 모습에서 성숙해진 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밭에서 소를 몰고 오고 있다.  참으로 정다운(?) 모습이다.  아직도 겸손한, 아마도 소극적인 자세에서 오는 겸손함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오고 그것은 그에게 성장의 기회가 되며 또 이스라엘이 연합하는 좋은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위기를 맞음으로 자신의 위치가 명확해 지는데, 사울은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하면서 사무엘보다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다.  확신있고, 지도자로서 책임을 지겠다라는 뜻이다.  수줍은 겸손에서 탈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탄한 삶을 사는 것도 복이지만 시험을 통과하면서 지도자로 세워지고 연합을 이루고 여러 면에서 성장을 이루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는 거의 놀다가 미국에 와서 다시 새학기를 시작하니 공부를 안한지도 오래 되고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미국 역사 과목 시험에서 처음 D를 받았다.  그래도 하노라고 했는데 처음 점수가 그렇게 나오니 걱정이 되었다.  공부를 좀 더 하니 다음 시험에는 C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B.  그렇게 올랐다.  한국에서는전혀 있을 수 없는 일, 시험이 기다려졌다.

학교 시험이건 생활에서의 시험이건 많은 경우 실수를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실망하고 또 화도 나고 절망도 한다.  하지만 크고 작은 시험들을 통과하며 혹은 피해가면서 경험이 쌓이고 조금씩 성장한다.  고전 10:13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한다.  여기에 세 가지 중요한 면이 있는데 1. 우리에게 당한 시험이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있는’ 종류의 시험이며,  2. 하나님께서는 미쁘신 분이기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시고, 3. 반드시 시험에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도 있다 라는 것이다.  시험을 통과하며 그것을 온전히 치르고, 배우고, 이겨내야 성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 그 시험을 피할 수도 있다.  (영어의 여러 번역에서 escape으로 나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은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짜증 나는 말이다.  즐길 수 없고 피할 수 없으니 시험인데 그것을 즐기라니?  그거 어떻게 하는지 좀 배우면 좋겠다.  음… 근데 나도 고등학교 때 즐겼었나?

개인적으로 지난 몇년 간 하나님께서 나의 ‘의’를 내려놓게 하시며 시험을 피할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전유성의 ‘조금만 비겁해지면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라는 관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아직도 붙들고 있던 ‘나의 의’를 다루고 싶으셨나 보다.

아무튼 위기를 통해 사울은 공식적인 지도자로 세워지고, 백성의 연합을 이루고, 자신의 위치도 견고케 하는 세번째 즉위식을 갖는다.  어떤 부부는 매년 다시 결혼식을 한다는 부부도 있고, 천주교 사제들은 임명될 때 치르는 의식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그에 비해 개신교 목사나 장로의 취임은 너무 간단하다는 푸념도 들었다.  의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또한 영향력도 크다.  우리 개신교도 목사나 장로, 혹은 선교사의 취임식 혹은 송별회를 좀 더 성대하게 하고 또 매년 재임식도 하면 좋으려나?

마지막으로 요즘 계속해서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가 ‘화’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셨고, 오늘 보니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시니 사울의 노가 크게 일어났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정이 없는 것이고 죽은 것이다.  어떤 상담인은 화를 내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소통’의 하나이기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고 도움이 된다면 화도 내고 욕도 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과연 그럴까?  그리스도인으로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6 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말한다.  즉 화를 내되, 죄를 짓지 말고, 그것이 분이 되어 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화’ (전에 anger management라는 영화도 나오고 요즘 이런 류 혹은 복수를 주제로한 영화들이 많다.) 가 죄와 연관되고, 혹은 연관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가끔 화가 난다.  그래서 ‘소통’의 방편으로 화를 낼 수도 있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은 serious한 이야기다’라고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화를 품고 말하면 내가 내 화를 못이겨 제대로 전달도 못하고 심할 경우 말도 더듬는다.  그리고 상처 줄 수 있는 말도 하게 된다.  아… 아버지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걸 보면 아마도 아이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우선은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고 잘못했을 경우에 대한 그 책임과 체벌을 확실히 하고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원리로 정하면 좋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모들에게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잔소리’라는 것을 설문을 통해서 알게된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허락된 것은 ‘거룩한 분노’이다.  즉 불의에 대해, 죄에 대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분열에 대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세상의 타락에 대해 나는 혹시 면역되거나 동조되어 가고 있지 않나?  그냥 그려러니 하고 있지 않나?  이웃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듯이. 거룩한 분노로 인해 그의 귀한 재산이었던 소 두마리를 각뜨고 그것을 이스라엘 전역에 보낸 사울의 엽기(?)행각은 그의 분노가 연합을 실천하는 분노임을 확인케 한다.

주여, 소극적인 자세를 좋아하는 저의 기질이 주님께서 안배하시는 상황으로 인해 거기에서 탈피하여 리더로 세워지며 주께서 분노하시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하시고, 나의 가진 것 주님의 것으로 알고 연합을 이루어 가게 하소서.  위기를 맞을 때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