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큐티에서 틀린 것이 있다.  오늘 큐티 해설을 보니 사울 이름의 뜻이 ‘요구하다’ 혹은 ‘요구를 받은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릴 때 사울과 바울의 이름을 사울은 ‘큰 자’ 바울은 ‘작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설교를 들어서 그렇게 이해했는데 그건 거짓이었다.  아… 잘못 배웠다.  이제 사울의 이름 뜻을 머리 속에서 새롭게 고쳐야겠다.  남미계 사람들 중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사울로 했을까 의아했는데 이제 그런 선입견이 고쳐졌다.  사울이란 이름은 좋은 뜻이다.

오늘 사울이 공식적으로 왕이 되는데,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무엘에 의해 이미 왕으로 세움 받았다.  하지만 이제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선포되고, 동시에 사무엘이 새로운 ‘왕국’으로서의 법규를 백성들 앞에서 선포하고 책으로 기록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  사무엘은 그 장소가 얼마나 넓었는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지파들을 불러 천 명 씩 나오게 하고, 차례대로 하나 하나 걸러내자 사울이 ‘뽑힌다’.  그런데 이 ‘뽑혔고’라는 말에 의문이 간다.  오늘 큐티 해석은 제비뽑기로 해석하고 있는데, 사실 그 부분이 애매해서 좀 찾아 보았다.

성경에서는 제비 뽑기를 한 것이 여러번 나오는데 구약에서는 예를 들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하는 것이라든가, 사람들에게 직임을 할 때라든가, 요나가 제비뽑기로 들통난 일이라든가, 그리고 신약에 와서도 맛디아를 뽑은 일 등 여러가지 예가 나온다.

그런데 오늘 ‘뽑혔다’라는 말에 영어 번역을 보니 ‘was taken’으로 나와있고, 히브리 원어를 보니 ‘제비 뽑기’와는 다른 말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혹시 다른 뜻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70인역 헬라어 구약(셉투젼트)에서는 ‘카타클레이루타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사도행전 맛디아를 뽑을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말인 ‘클레이로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제비 뽑기가 맞는 것 같다.

사람을 세울 때 그 자격과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가 있고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 이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사람을 세우는 교회도 아직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성경적일까?

사도행전의 예를 들면, 가룟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 제비뽑기로 맛디아를 얻었지만, 그냥 제비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제비를 나눠주고 선출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분명 자격이 있었다.  사도행전 1장 22에는 그 자격이 나오는데,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과연 이 맛디아는 사도로서 무슨 일을 했을까?  그는 그 후에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사도바울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자칭 사도로 나선다.  그리고 자칭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참된 사도이다.  이런 면에서 신약에서 제비뽑기가 끝는 것으로 많은 이들이 결론짓는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이제 성령께서 이끄시고 말씀하신다면 제비뽑기가 왜 필요한가?

그런데 요즘은 제비뽑기가 오히려 필요한 때일 수도 있겠다.  왜냐면 리더들 중 많은 이들이 이기심과 과시욕으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려 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을 세우는데 있어 그 기본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굳이 가이드라인을 두자면 역시 사도행전의 6장3절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일 수 있겠다.  성령, 지혜, 그리고 칭찬 듣는 사람.   ‘칭찬듣는 사람’이라는 뜻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데, 물론 여기에는 사회적 지위나 학위도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너희 가운데서’라는 말일 수도 있다.  교회에서 새로운 리더를 세우는데 왜 많은 경우 다른 곳에서 청빙해 오는지 알 수 없다.  새로 세워지는 이에 대해 아니꼬와서 그런가?  언젠가 김양재 목사의 설교를 잠간 듣다가 한국인은 수평적인 지위 즉 같은 그룹 내에서의 평등은 반드시 지켜지지만, 그것이 깨질 때 예를 들어 같이 입사한 동기가 자기보다 먼저 승진을 했다거나 할 때 상대적인 비참함이 상상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교회의 리더십이 이런 승진의 문제로 비쳐진다는 것이 문제 아닐까?

그러고 보면 갈라디아서 3장 3절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를 준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아… 나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울 때 소위 ‘피카소의 동전’을 던지려는 유혹이 많다.  제비뽑기는 편하지만 무릎꿇어 주님의 뜻을 의뢰하는 것은 내 본성이 싫어하는 것이다.   나의 십자가여, 너의 무게로 나를 무릎꿇게 하라!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