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리고 여호와 섬기기가 힘들었을까?  동시에 왜 그렇게 ‘다른 신들’을 섬기고, 결과적으로 깨지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또 다시 돌아오고 하는 역사를 반복했을까?  이유는 간단한 것 같다.  ‘이방 신들’은 형상이 있고 우상이기 때문에 볼 수 있어 ‘섬기는 것’이 쉬웠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즉 다른 ‘신들’과는 차별된 ‘보이지 않는, 그리고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이 사실 참신이시다.

여호와의 궤가 20년 동안이나 기럇여아림* (이름도 힘들다)에 있었다.   이 기럇여아림은 조선시대로 비교하자면 백정마을이다.   그래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그 곳으로 떠넘겼다.  성막에 안치되어야 할 법궤는 그래서 20년 동안이나 아비나답의 개인집에 머무르게 된다.  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20년 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다.  동시에 우상숭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무엘은 미스바로 모두 모여 회개하게 하고 이것을 빌미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게된다.  옛날 고대의 전쟁은 모두 평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평야로 모이자 블레셋은 아마도 위협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여 블레셋을 치신다.

다시 우상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흔히 ‘우상’하면 절에 안치한 부처상을 연상한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불교와 싸움이 잦았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기독교 안에도 우상이 많다.  이것은 내가 전에도 쓴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나은 이유’에 나온다.  천주교의 마리아 및 성인들의 상, 그리고 예수상 조차도 모두 우상이다.  기독교는 그러한 상은 없지만 소위 ‘성화’라고 하는 것이나 대게 본당 앞에 위치한 십자가는 사람들에 의해 우상화 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십자가를 상징으로 봐야지 그것을 향해 기도하거나 그 밑에 꿇어 앉아 기도하면 기도를 더 잘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벌써 우상화된 것이다.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를 져야하고 그것은 목에 걸거나 벽에 부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과 인격 위에 얹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우상을 의지한다.  특히 많은 경우 돈이 우상이 된다.

어제밤 페북 친구이신 백바울선교사님의 책 ‘위대함을 선택하라’를 끝냈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고 내용도 쉬워서 이틀만에 끝냈다.  그 내용이 매우 좋지만 그 중에 ‘돈이 풍성하면 평안할 것 같지만 돈이 모일수록 불안하다’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맞는 말 같다.  돈이 우상이 되어 그렇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왠일인지 사무엘의 말에 순종하여 모든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섬겼다.  여호와를 섬기다…  과연 무슨 뜻일까?  과거 바알과 아스다롯은 우상의 형상이 있어서 그 앞에 나아가 분향도 하고 제사도 하고 했었겠지만, 이제 보이지 않는 유일신이신 여호와를 섬기게 된다.  아마도 익숙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율법의 율례대로 섬기려고 했겠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를 섬긴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느끼게도 한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많은 상상력과 믿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건물을 건축할 때 특히 이제껏 한번도 지어진 적이 없는 형태의 건물을 지을 때 많은 상상력과  믿음이 요구된다.  이와 같이 수십년 동안 ‘보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더 많은 힘과 정성이 들었을 것 같다.  아무튼 우상을 제거한 그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율법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율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보이지 않는 유일신을 섬기는 것은 우선적으로 기도와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큐티를 한다.  지금에 와서야 ‘큐티’라고 하지만 이러한 용어가 나오기 전에도 ‘말씀묵상’은 계속있어왔다.  그리고 ‘큐티’라는 말이 콰이엇타임, 즉 ‘조용한 시간’으로 번역되지만, 결코 ‘조용’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  사람에 따라 말씀을 외칠 수도 있고, 계속 읖조릴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일정 단어를 가지고 몰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큐티에는 왕도가 없을 것 같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그 말씀으로 씻고, 말씀을 공부하고,  그 나눔과 적용이 자신에 국한되던 아니면 담장을 넘던 자신을 내어드린다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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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럇여아림’이 어떤 동네인지 잘 몰라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래와 같다:

기럇여아림은 기브온 등과 함께 여호수아에게 거짓 사신을 보내었던 부족이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를 쳐 부수었다는 소문을 들은 그들은 꾀를 내어 멀리서 온 것처럼 꾸미고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로 가서 화친조약을 맺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사흘만에 거짓이 탄로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한 사역에 동원되었다.

그후 기럇여아림은 하나님의 법궤를 보관한 장소로 유명해졌다. 엘리 제사장 당시 에벤에셀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법궤는 일곱 달 동안 블레셋 도시들을 떠돌아 다녔으며, 마지막으로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실려 벧세메스로 되돌아 오자 사람들은 이를 기럇여아림으로 옮겨 보관하였던 것이다.

이때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를 들이고, 아들 엘리아살을 구별하여 20년 동안 지키게 하였다. 그후 벱궤는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을 거쳐 다윗성으로 모셔졌다.

또한 원래 이름은 기럇바알(기럇은 성읍이라는 뜻)  즉 바알 우상이 가득했던 곳이지만 법궤가 들어오고 기럇여아림(수풀의 성읍, 즉 생명이 충만한 성읍)으로 바뀌었다.

안타깝지만 법궤가 떠난 후 ‘바알레 유다’로 불리우며 다시 우상의 도시가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