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함

고전 10장9절에서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출애굽하게 하신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뿐만 아니라 좋은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 하나님을 시험했다.

이스라엘은 성막 안 그것도 지성소에 있어야 할 성궤를 전쟁에 쓰려고 하나님에게 의뢰하지도 않고 밖으로 빼내오고,  결과적으로 참패를 당했다.  성궤를 전쟁에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는 여리고 성을 돌때 뿐이었다.  성궤는 성막을 이동할 때 움직이고, 더우기 덮개로 가려서 레위인이 이동하는 거룩한 물건이기에 함부로 성막 밖을 나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이유로 성궤를 자신들의 이익의 도구로 쓰며 하나님을 시험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성궤를 직접 본 사람은 얼마나 있었을까?  사실 성궤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그것도 어두운 지성소에서만 그 전체를 볼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 성궤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실체는 믿지만 이동 중 조차 덮개로 가려야 했고 레위인들만 움직일 수 있었기에 일반인들이 성궤를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13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를 보고 기뻐한다.  무언가 오는 것이 궤임을 알았고, 그것은 여호와의 성궤인 것도 눈치챘을 것이다.  ‘아, 성궤가 다시 우리에게 오는구나!’라고 감격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수래를 장작으로 쓰고 암소 둘을 번제물로 드렸다.  그런데… 암소를 번제물로?  레위기 23장 18절에는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라고 말씀한다.  즉 번제는 수소로 드리게 되어있다.

거기에 분명 레위인도 있었는데 이런 엉터리 제사를 드린다.  아~~~~ 증말… 이런 제사는 하나마나다.   레위인들은 또한 금 보물 상자도 맘대로 처리한다.  더우기 ‘여호와’ 앞에 ‘다른 제사’를 드린다.  이 대목에서는 ‘다른 불’을 드려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가 생각나게 한다. (민 26:61)  왜 레위인들이 이모양일까?  물론 제사장들이 당시 그 모양이었으니 레위인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모양일 수 밖에…  결과적으로 많은 수가 즉사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 혹은 예배할 때 그 분의 정하신 방법으로 제사혹은 예배드려야 한다.  잔 파이퍼가 ‘선교는 예배를 위해 있다’라고 말함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우리에게 있어 예배란 것이 다른 기독교 용어 혹은 실행 등과 같이 그 원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중고등부 혹은 EM전도사로 있을 때 학생들이 ‘Let’s worship’하면서 시작한 것은 ‘찬양’이었다.  즉 그들 세대에게 있어서 예배=찬양, 그것도 당시 유행하던 찬양들이 곧 예배였다.  찬양이 끝나고 말씀 시간 혹 다른 시간은 ‘예배’가 아니었다.  큰 문제였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들 그리고 그 윗 세대에 있어 예배는 또한 ‘집회’로 인식된다.

하지만 성경에서 예배는 몸을 구부리고 하는 ‘절’이다.  왜 ‘절’에서는 ‘절’을 하는데 교회의 예배에서는 절을 하지 않을까?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말씀하셧따.  그런데 개정역에서는 번역이 더 잘되어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런데 영어에서는 (헬라어도 마찬가지 이다)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혹은 참, 실제)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라고 되어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 방법대로, 우리가 편한 대로, 우리의 열심으로, 우리의 뜻과 지혜와 상식대로, 감정과 감성을 자극하는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가 된다.

아!  ‘영 안에서’라는 말은 참 쉽지 않은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율법을 맡기지 않고 전체가 그 말씀을 읽고 주의를 했다면 그렇게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 율법의 말씀은 저 멀리 있던 그 무엇이었다.  은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영’ 또한 그런 것 아닐까?

 

오늘 이 현재와 그 상황에서 살지 않고, 영이란 깊은 지성소에 몰입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 안에 계신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