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이 하나님을 시험함

오늘 큐티 본문 역시 블레셋 땅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꽤 오래 전에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직분취임예배때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그 해석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두 암소가 꼭 직분자들을 나타낸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블레셋 방백들은 그들에게 닥친 여러 가지 재앙들이 과연 법궤를 가져왔기 때문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들의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상식 혹은 자연적인 것을 초월하는  일이 발생하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역사일 것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그렇게 따른다.

이러한 문제해결은 그들에게 있어 당연하고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여러 재앙을 당했지만 7개월이나 법궤를 계속 가지고 있는 블레셋의 속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전리품 혹은 무언가 좋은 것을 얻은 것으로 기대했는데 혹 재앙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전전긍긍하며 버리지도 되돌려 보내지도 그렇다고 여호와의 궤를 섬기지도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측은하기 까지 하다.   마치 사업을 시작했는데 잘되지도 그렇다고 접을 수도 없어서 전전긍긍했었던 나의 모습같기도 하다.

내일 큐티에 나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궤를 열어보고 다수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블레셋 방백들은 법궤를 다루는 법을 몰랐을텐데 누구도 죽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들의 신이 아니지만 그래도 ‘신에 대한’ 경외함으로 건드리지 않았을까?  정말 아무도 그 궤를 만지거나 열어보지 않았을까?  만약에 한명이라도 만지거나 열어서 죽임을 당했다면 기록이 되어있을텐데 그런 기록은 없다.  왜일까?  잘 모르지만 둘 중 하나이다.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심해서 두려움 때문에 정말 손대지 않고 열어보지 않았든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법궤에 대한 법이 엄중했지만 이방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하지만 그들은 법궤를 여러번 옮겼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의 규례를 모두 지켰으리라 보기 힘들다.

10대 때 장로님의 아들인 친구집에 놀러가서 가정예배를 함께 드렸다.  예배를 끝내고 모두 함께 외치는 구호가 있었다.  ‘남들에게는 관대하게 자신에게는 철저하게’였다.  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남들이건 자신이건 똑같이 대해야지 달리 대하는가?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사실 하나님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때 이방인들과는 차별되는 그의 백성에 대한 경륜이 있었다.  예수님 조차 이방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른 것에 대해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주님을 모르고 그를 부정하고 시험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직접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왕같은(왕적, 혹은 왕족) 제사장들이 되었다.

블레셋의 우스꽝스러운 해결책은 미개하다고 까지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들의 초자연적 현상을 바라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방이 잘되거나 불신자들이 믿는 자들보다 잘 사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 그들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전에는 그랬지만 보내심을 받은 여러 충성된 일꾼들로 인해 우리가 은혜 안으로 들어왔던 것 처럼…

 

하나님을 시험함에 있어 이방과 하나님 백성의 차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함

역시 그들의 방법대로 – 그러나 그 이유는 두 가지: 배우지 못했거나, 배워도 주의하지 못했거나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도 자신들의 신들에게서 돌아오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