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혹은 영적 리더가 되고 그 삶을 산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으면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볼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 대해 영적으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볼보는 것 조차 쉬운일이 아닌데, 그 외 다른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자기 시간은 물론이요 많은 경우 자신의 가정을 돌보는 일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영적 리더로서 은혜의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훈계와 책망, 더 나가아서는 심판에 대한 말씀도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처음 부르셔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은 사무엘이 그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자신의 영적 리더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었다.  그 당시 사무엘의 나이가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그에게 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보통 회개를 하고 난 후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을 때 들리는 음성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씀을 가장 많이 듣는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돌이켜 보면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어떨 때 하나님은 믿음이 좋을 것 같은 이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때도 있다.  굉장히 당황했고 한동안 고민했다.  결국 메시지를 전한 후 돌아온 응답은 ‘황당하다’ 였다.  목회자 가정이었고 적어도 문제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몇 년 후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전했던 말씀이 맞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 일이 괴로와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포기했었다.  몇년 간 성경을 읽는 둥 마는 둥 했었다.

선교지로 파송할 때 많이 인용하는 성경구절 이사야 6장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의 말씀은 조금 더 읽어 내려가면 ‘복음’과 ‘희망’의 메시지를 위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멸망에 대한 메시지를 위한 부름이었다.  그런 말씀에 대한 이사야의 반응은 어땠을까?  고민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자신도 황당하지 않았을까?  사무엘도 내일 큐티를 보면 역시 굉장히 고민했던 모습이다.

하지만 심판의 말씀이건 부흥의 언약이건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힘이 없다.  주의 전은 정결케 되어야 하고 심판은 치유를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