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가 사무엘을 여호와께 바친 후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은 것은 참으로 위안이다.  이것은 주님께 무엇을 드리면 그 이상 더 많이 주신다는 공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복이 항상 일어나지 않을지언정, 한나에게 임한 복의 기록은 나에게 위안을 준다.  그 복이 제사장 엘리를 통해 받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복이 한나에게 임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한나의 복은 후에 얻는 자녀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바친 사무엘임을 알게된다.

아무튼 오늘은 부정적인 자녀와 긍정적인 자녀 두가지 비교가 나온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여호와 앞에 바쳐저 섬기는 사무엘과,  처음부터 레위인으로 태어나 제사장들로 섬기게 된 엘리의 두 아들이다.   그런데 종교적 ‘가문’에서 태어난 엘리의 두 아들은 항상 보고 배운 것이 제사에 관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행실이 나빠서 여호와를 알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여호와를 제대로 몰라서 행실이 나쁜 것이지 모르지만,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구약의 그 복잡한 제사 제반에 대한 모든 규례를 행했던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모를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지구와 달 사이도 아니고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도 아니며 흔히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라고 한다.   그말은 무언가 알고는 있지만 가슴으로 느끼며 동감하고 감동하는 것에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말 무언가 ‘알게’ 된다면 즉각적으로 감동이 올 것이다.  예수님은 좋은 땅 비유에서 “(마 13:20-21)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말씀하신다.  즉 말씀 자체를 깨달았을 때 정상적인 반응은 곧 감동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면 가장 긴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이 아니라 가슴에서 손까지의 거리다.  즉 깨닫고, 감동하고,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의 ‘깨닫는’의 헬라어는 ‘수니오’ 인데, 이것은 ‘수니에미’에서 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수니에미’라는 단어는 ‘순’과 ‘이에미’의 결합어이다.  ‘순’은 ‘with’라는 뜻이고 ‘이에미’는 ‘보내다’라는 뜻이다.  이 말이 왜 ‘깨닫다’의 뜻이 될까?  이 말은 ‘생각 속에서 뜻을 조합하다’라는 뜻이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언가 머리 속에서 조합되고 그것이 우리 생각과 이성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런데 더 생각해 보면 보내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좋은 땅’에서 ‘보내진’것은 씨요, 말씀이요, 생명이다.  즉 생명이 우리에게 ‘깨달아지면’ 즉 하늘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마음으로 ‘보내지면’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된다.  아쉽게도 돌밭에 뿌려진 씨는 그 자체는 생명이었지만, 돌밭에 뿌려졌을 때는 단지 ‘정보’만 되었다.

엘리의 두 아들에게는 이 ‘좋은 땅’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은 오로지 욕심과 투기로 가득했고 여호와를 멸시하기까지 했다.  말씀을 평생 배워도 열매가 없는 것은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앙의 ‘가문’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가정’이 지금은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