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큐티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물론 묵상하고 상고해보지만 또 한면으로는 그 책이 씌여진 당시 같은 말씀을 읽은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를 받아 읽은 당시 로마인들은 바울이 말한 ‘구원’에 대한 개념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  ‘구원’ ‘칭의’ ‘성화’ 등의 말들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는 당시 무엇이었을까? 하는 식이다.

오늘 큐티에는 제사,  레위인들과 대제사장, 주님의 영문 밖에서 죽으심, 미래의 도성, 찬송, 예배, 선을 행하고 나누어줌, 순종과 복종 (obey & submit), 영적 리더들 등 많은 내용이 있지만 13절의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는 말씀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히브리서가 씌여진 목적을 염두에 두면 이 부분이 아마도 많은 당시 독자들에게 도전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은 핍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은 생존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배교하려는 유혹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 또 그 반면에 오히려 ‘새로운 종교’ 안에서 높아지려는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주님의 모습을 다시한번 상기 시키며 구약과 비교한다.  즉 그리스도와 복음은 구약의 실제이고, 그 분은 오셔서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음으며,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당시 ‘영문 밖’이라는 의미는 분명 유대교를 벗어난 것을 뜻했을 것이다.  벌써 적어도 1500년 이상을 이어온 뿌리 깊은 종교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고 더우기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는 세상적으로 힘과 권력의 상징이나 매력적인 모습이 아닌 치욕스런 죽음을 택하신 분이었기에 오늘 종교적 자유를 만끽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상황에 동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서’이다.  왜 하필 ‘히브리서’일까?  원어는 ‘프로스에브라이우스’ 즉 히브리인들에게 라는 뜻으로 이 ‘히브리’ 혹은 ‘히브루’라는 말은 ‘전통적 유대인들’이 아닌 특히 구약 시대의 핍박받는 사회계층을 뜻하는 말이다.  즉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소외계층을 위한 책이라는 뜻이다.  유대교를 나오고 혹은 이방의 전통종교를 떠나 ‘치욕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종교를 택한 새로운 히브루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계속 믿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매년 수만의 목회자들이 졸업하고 있다.  그들 중에 진정 사명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함으로 목회의 길을 걷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중 또한 많은 이들이 사명과는 상관없이 신학을 하고 또 안수까지 받아 목사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 중에 양심이 있어서 목회를 하지 않는 이들은 상관없겠지만,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부흥을 꿈꾸며 자신들이 삯꾼임을 알지도 못하고 열심으로 자신을 속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 중 좋은 많은 분들이 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목회자들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또한 그러한가? …

보통 지상(至上)명령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28: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의 말씀은 앞의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의 말씀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냥 가라고 해서 가고 제자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가 위임되었고, 그러한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믿는 이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3장 1절 부터 9절까지의 모든 명령과 권유는 8절 말씀이 있기에 가능하다.  세상이 더욱 악해지고 여러 다른 문화들이 충동하고 말세의 모든 현상이 나타나지만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  각 구절에서 명령과 그 지키는 이유도 부가적으로 설명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계시고 그 분은 항상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법도 변하고 교과서도 개정되고  가치관도 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