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오해하지 않기 위해 전에 썼던이슬람이 기독교보다 나은 점1을 인용한다.
“분명히 해 두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슬람이 가장 큰 이단이라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의 첫번째 구분 기준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예배’라는 말을 생각하면 ‘교회당’에 여럿이 모여서 ‘예배 시작하겠습니다’로 시작하여 찬양, 기도, 설교, 광고 등 여러 순서를 거쳐서 ‘예배를 마쳤습니다’라고 할 때까지의 순서의 연장을 연상한다. 이것은 의식화(ritualized)된 ‘집회’이며, 물론 성경에도(고전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라는 말씀처럼 분명히 이러한 ‘예배’는 있다. (고정된 ‘의식’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비기독교인들도 알고 있는 예배의 모습 외에 성경에서 더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예배가 있다. 그것은 로마서 12:1절의 ‘영적인 예배’로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하는 우리의 몸을 제사로 드릴 때 가능한 예배, 즉 삶 속에서의 예배이다.
우리 말에는 ‘예배’라는 말과 ‘경배’라는 말이 개역 성경에서는 많이 혼용되었는데 개정에서는 좀 구분을 하려고 노력했다. 히브리 성경과 헬라어 성경에서는 ‘예배’라는 단어에 약 4-5가지 다른 말을 사용하는데, 그 중에 중요한 단어는 요한복음 4장에 계속해서 나오는 ‘프로스쿠네오’라는 말로 (προσκυνέω, G4352) ‘손에 입을 맞추다’ 는 뜻과 함께 거의 대부분 ‘무릎꿇어 경배하다’, 즉 ‘경배’라는 뜻이 강하다.
또한 위 로마서 12:1의 단어로 영어에서는 많은 번역에서 ‘service’라고 되어었고, 또한 ‘예배학 (Litergy)’이라는 영단어의 어원이 되는 ‘λατρεία, 라트레이아’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좀 이상하다. ‘라트레이아’라는 단어는 우리의 몸을 드릴 때, 즉 삶 속에서 예배자의 삶을 살 때 가능한데, 그 단어는 오히려 ‘집회’에 해당하는 단어로 많이 쓰인다. 그 반면에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무릎꿇고 경배하는 행위로서 ‘프로스쿠네오’가 쓰인다.
우리가 ‘교회당’에 모여 ‘예배’할 때 우리는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가? 그냥 편하게 앉아서 시간되면 눈감고 있다가 기도 끝나면 눈뜨고, 혹은 찬양할 때 가끔 손을 들어 찬양하고…
이것이 이슬람 예배 형태가 기독교 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다. 기독교는 초기 학문의 형태로 중국에서 들여온 것을 제외하고는 어차피 미국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예배의 형태 역시 미국식이다. 안타깝지만 미국은 이제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기독교가 가장 강한 종교인 나라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왜 자꾸 한국에서 미국으로 신학하러 오는지 너무 궁금하고 안타깝다. (물론 학문적인 성과와 연구자료는 많겠지만)
아무튼 이슬람은 매일 다섯번 짧게라도 ‘프로스쿠네오’하는데, 우리는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등 여러 ‘예배 시간’은 있지만 그 중 어떤 예배 시간도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큰 ‘예배당’에서, 여러 좋은 ‘순서’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또 헌금하면서, 은혜의 말씀을 들어도, 그 누구도 엎드려 경배하지 않는다. 찬양할 때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라는 가사로 찬양해도 몸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ㅠㅠ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때 머슬림들이 하는 것 처럼 무릎꿇고 두 손을 하늘 향해 들고 경배하면 좋겠다. ‘영적인 예배’를 거들먹 거리며 그 말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면 할말 없지만, 그렇게 하면 ‘말씀’으로 먹으니 성찬이 필요없다는 말도 할 수 있고, 세례나 침례도 필요없다고 할 수도 있다. 다 필요한 것이다. ‘영적 예배’를 회복하면 좋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또 우리의 모임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