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3년 쯤, 당시 EM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주일 오후예배 시간에 전한 말씀을 요약한 것이다)
비행기는 많은 사람과 물건을 싣고 하늘을 날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비행기는 첫째 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넓은 활주로 공간을 허비하는 비효율적인 고철 덩어리가 되고 만다.
비행기를 날 수 있게 하는 다섯가지 원리가 있다. 물론 베르누이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적용되고 양력 부력 중력 항력 등의 힘이 작용하는 등 기본적인 원리가 있지만,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원리는 아래 다섯가지이다.
첫째, 비행기는 날개가 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것 중 거의 대부분 날개가 있다. 비행기를 처음 볼 때 그것을 비행기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날개이다. 특히 여객선의 날개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어떻게 그렇게 무겁고 큰 쇳덩어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과 짐을 싣고 비행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역시 날개 때문이다. 날개는 보이지 않는 공기를 딛고 (물론 과학적으로는 ‘딛고’라는 표현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하늘로 솟구친다. 독수리는 하늘로 솟구칠 때 ‘날개치고’ 올라가지 않는다. 잘 부르는 찬양 중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이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원래 ‘soar like an eagle’ 즉 독수리 처럼 솟구쳐 올라간다는 뜻이다. 독수리는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가듯, 비행기가 바람타고 비행하듯, 비즈니스가 안정권에 접어들면 그 자체가 탄력을 받듯, 우리는 ‘영’ (바람, 공기)이신 성령의 힘을 받아 솟구쳐 올라간다. 즉 날개는 보이지 않는 것(공기)을 믿고 활용하는 우리의 믿음이며, 교회의 구성원으로 치자면 나이가 지긋하셔서 그 삶으로 믿음의 경륜을 쌓아오신 어르신들이다. 머리가 희끗해져서 은빛으로 보이는 은빛 날개이다.
둘째,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추진력이다. 날개가 커서 동력이 없이 날 수 있는 것을 글라이더라고 하지만 그 효율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혹은 추진력만 크고 날개가 없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로켓, 폭탄, 혹은 미사일인데, 그것은 대부분 살상 무기로 만들어 진다. 즉 추진력에 앞서는 것은 믿음이다. 하지만 추진력 역시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엔진과 연료로 만들어진다. 비행기가 추진력을 얻기위해 태우는 것은 엔진이 아니라 연료이다. 만약 연료대신 엔진이 탄다고 하면 큰일이다. 모세는 생애 처음 40년 동안 자신의 삶 자체를 태우려고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광야에서 40년 훈련기를 거친 후 진정 그의 삶을 내어드려 부족한 ‘엔진’이지만 불타는 가시나무를 통하여 성령이 대신 연료가 되어 추진력을 발생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지성과 인격인 ‘엔진’을 잘 살피고 깨끗하고 쓸모있게 해야하지만 결국 그 힘은 성령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로 치자면 힘을 낼 수 있는 허리격인 젊은 층이다. 이들은 대개 비행기 엔진이 날개 아래 붙어있듯 믿음의 선배들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아는 것이 많다고 돈이 좀 있다고 믿음이 좀 된다고 어르신들을 무시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인들만 모이는 교회도 문제가 있지만 젊은이들만 모이는 교회 역시 문제가 있다고 본다. 둘째는 추진력이다.
셋째, 무게가 가벼워야한다. 비행기 설계자들은 세가지 요소를 놓고 비행기가 뜰 수 있는지 계산을 하는데 그것은 비행기 날개의 면적, 추진력, 그리고 전체 무게이다. 즉 날개가 아무리 크고 추진력이 아무리 크다해도 무게가 그것을 이겨버리면 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각 개인적으로는(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는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죄와 허물 혹은 관계나 환경들이 우리를 짖누를 때가 있다. 이러한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 교회적으로는 부흥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인본주의라든가 권위주의라든가 당파 싸움이라든가 아니면 건물을 너무 크게 지어 재정적으로 압박이 너무 심하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얽매이기 쉬운 죄와 허물들이다. 또한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사랑으로 권면하고 또한 필요한 경우 장로들은 치리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필요한 문제이다.
네째, 발란스가 있어야 한다. 몇년전 미국 동부로 여행하는 비행기에 탄 적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사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흩어 앉게 했다. 한 곳에 모여 앉히면 서빙하기도 편할텐데, 그때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행기는 사실 무게의 발란스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비행기 앞부분이 무거우면 nose heavy라고 하여 처음 이륙이 힘들어진다. 반대로 뒤가 무거우면 tail heavy라고 해서 처음 이륙은 쉽지만 이륙한 후 stall이라고 하늘에서 멈춰서 바로 추락할 수 있다. 그래서 짐도 무게를 고려해서 나누어 골고루 싣는다. 발란스가 안맞으면 이륙한 후에도 문제가 생기는데, 비행기가 안정적인 비행을 할 수 없게 되어 연료를 필요 이상 쓰게 되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상하좌우로 움직여줘야 한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발란스는 필요하다. 아무리 영적인 것이 중요해도 소위 ‘덜 영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다. 학생은 학생답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주부는 집안일에 순교적인 자세로 좋은 음식을 만들고 또 집을 아름답게 가꾸고 가족들에게 심리적으로 힘과 안정이 되어야 한다. 가장은 열심히 일하여 집을 세우고 아내와 (가장이 여자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을 잘 지도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말씀에 순종을 배워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떡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교회에 나가 말씀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안정을 섬기는 것이다. 발란스를 맞추기 위해서는 쳐내야 하는 일이 필요하다.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에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영어로 prune이다. 이 말씀은 가지치기 이다. 즉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필요없는 것들은 잘라낸다는 말이다. 만약 발란스가 깨진 삶을 살고 있다면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부분은 잘라내야 한다. 그것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든 무엇이건 건강과 관계를 해치는 것이라면 잘라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위의 모든 것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 없으면 절대 이륙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바퀴’이다. 아무리 날개가 크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아무리 추진력이 강한 엔진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발란스가 맞고 무게가 가벼워도 현실 세계인 활주로를 달리게 할 수 있는 것은 바퀴 즉 희생이다. 세계의 각 공항에서는 매년 약 1억원을 들여 활주로에 눌러붙은 바퀴 타이어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을 한다. 즉 바퀴는 그 육중한 무게를 견디어 내며 자신의 일부가 떼어지는 아픔을 참아가며 교회 전체를 땅을 초월하여 비행하게 하는 것이다. 비행기가 클 수록 바퀴 수와 크기가 크듯, 공동체를 온 몸으로 짊어지며 섬기는 목자들 장로들, 그리고 이름없는 주의 종들… 이들이 바로 바퀴이다. 바퀴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억울하다. 그 누구도 ‘야~ 날개 참 멋있다’라고 하듯 ‘야~ 바퀴 참 멋있다 잘굴러가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공중에 우선 뜨게되면 계속 밖에 있지않고 숨어 버린다. 억울하다고 계속 밖에 있기를 원하면 둘 중 하나인데, 비행기 속도에 큰 압박을 주어 비행 전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아니면 비행기의 속도와 기압으로 꺾이게 되거나 이다. 하지만 한 지체로서 기능을 발휘하여 숨어 버릴 때 숨으면 문제가 없다. 이것이 참된 사역자의 모습이다. 자신의 영광을 혐오하는 것. 주의 몸 전체가 영광받게 하는 것. 그러나 바퀴의 섬김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삶이나 항상 업 다운이 있다. 좋은 때가 있다면 힘든 때도 있다. 이륙의 순간이 있다면 또한 착륙의 순간도 있다. 다시 한번 그 무게를 견뎌내고 공동체의 체중을 버텨내는 때, 착륙의 때, 더 많은 압력과 긴장이 요구되는 때 바퀴들은 또 한번 그 빛을 발한다.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어 왔는가? 그때마다 이 바퀴같은 훌륭한 주의 종들은 희생을 감내하며 기독교를 지켜왔다. 그들이 비록 유명한 신학자나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나 혹은 그 어떤 영광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순교와 수고와 희생을 통해 교회는 존재해 왔다.
전에 잘 부르던 찬양 ‘할 수 있다 하신이는’의 후렴구에는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희생만이 희생만이 능력이라 하시네’라고 선언한다.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능력인가? 모두 다 이다. 우선 믿음은 능력이고 (롬 15:13, 고전 2:5, 갈 3:5, 살후 1:11, 벧전 1:5) 사랑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며, 희생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우리 이 땅의 여러 주님의 공동체가 세상의 어지러운 것들을 초월하여 하늘로 멋지게 비상하는 그림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