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오해하지 않기 위해 분명히 해 두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슬람이 가장 큰 이단이라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의 첫번째 구분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종교를 ‘또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고 그들과 웃으며 지낼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종교인들과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슬람이 이단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보다 나은 점이 몇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소위 ‘성화’라는 그림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초기 카톨릭에서 글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성화를 성당 곳곳에 그려넣은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 성화 자체에 감성적으로 또 영적으로 애착되어서 그것들을 우상시 하게 된 것이 문제이다.

내가 중학생 때 하루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만들어 놓은 석고상을 보고 기도를 했는데, 그후 온 몸에 두드러기가 솟았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어떤 형상을 보면서 기도하지 않는다.

고후 5:16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그가 예수님을 단 한번도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신약의 3분의 2를 쓴 사도로 세움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다른 사도와 비교할 때 그의 핸디캡이었겠지만, 동시에 다른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기억하는 반면, 바울은 그것을 벗을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위로와 희망을 준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책 ‘제자입니까’ 혹은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서 (어느 책이었는지 잘 생각이…) 우리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2000년 전에 턱수염을 기르고 샌달을 신고 갈릴리 호수가를 거니시던’ 분으로 항상 기억하지만 그것을 벗어나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오늘의 그리스도를 봐야한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오늘 그리스도의 모습은 계시록 1장에 나오는 무서운 모습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려는 시도는 그치고 오늘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고,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