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1학년 때 남미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스낵 시간과 점심 시간에 전도하며 지냈는데, 그들은 오순절 계통이어서 방언을 중시했다. 그들과 동역하기 위해서는 방언을 받는 것이 필요했고, 나 역시 방언에 대해 궁금해하던 터라 약 3개월을 방언을 달라고 기도하다가 드디어 학교에서 점심 시간 기도하는데 방언을 받았다. 처음 방언을 할 때 너무 기분이 좋았고 혹시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이런 사람 많을 것이다. ㅎㅎ) 집에 와서 차 안에서도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 후 고등학교 친구 그리고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들도 방언을 받았다.
약 23년전 쯤 빈야드 출신의 스티브 롱이라는 사람이 한인교회들을 돌면서 소위 ‘신령한 은사’를 선전하면서 사역을 했고, 나도 잠시 그들의 사역을 좇아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그리스도인의 열매보다는 은사 자체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더 커지는 것을 보고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한 일들은 계속 몇몇 교회에 이어져서 오히려 어떤 집회에 가니 그 은사를 가지고 회중을 ‘entertain’하듯 ‘You want more?’ 하며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상당한 불쾌감을 갖게 되었다.
약 3년 전에 마지막으로 사역하던 교회 중고등부 겨울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내심 하고 싶던 일은 바로 학생들에게 방언을 받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몇몇 아이들도 관심이 있었고 또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역사를 하셨다. 소위 ‘천사의 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학생들 중 영어를 모르는 한 자매에게 옆의 형제 자매들이 통역을 해 주어 말씀을 이해하게 한 사건이었다. (메세지는 모두 영어였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의 교만을 드러내시고 (내가 방언을 받게 해줄 수 있다는 교만), 정작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셨다. 그 학생들, 어린 심령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기한 일이나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소위 ‘성도들의 교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처음 방언을 받고 며칠 동안 행복했으나, 오히려 나의 생활은 더 나태해지고 열매가 더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러한 느낌은 이중적인 것일지 모르지만, 방언 자체가 나의 영성이 아님을 배우게 되었다. 성경은 사실 방언은 믿지 못하는 이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고전 14:22, 개정)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이 말은 ‘믿지 못하는 타인’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동시 ‘믿지 못하는 내 자신’을 뜻할 수도 있겠다.
지난 개역성경에서는 방언을 뜻하는 헬라어 ‘글로싸 ‘와 지방 언어를 뜻하는 ‘디알렉토’ 모두를 방언으로 번역하여 좀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으나, 새로 편집한 개역개정 성경에는 ‘글로싸’만 방언으로 번역하려고 한 노력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 둘이 그렇게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무튼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알아듣는 ‘지방 언어’ 혹은 외국어이며, 하나는 소위 말하는 ‘천사의 말’이다. 무조건 방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우기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라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방언을 받은지 27년이 지나도록 통변의 은사를 받지 못하여 내가 하는 말을 모른다는 것이다. 더 사모하고 기도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