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물리학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언급하며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선택권이 있는가 하는 종교적 철학적 문제에도 접근하게 되었다. 쉬운 예로 당구대의 당구공을 항상 같은 각도와 같은 힘으로 치면 반드시 같은 운동을 보이는 것 처럼 시간과 공간 역시 많은 변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과는 이미 정해진 대로 되어갈 것이라는 설이다. 물론 훨씬 더 복잡한 설명들이 있고 인간의 삶은 물체의 운동 현상 그 이상이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말씀대로 이루리라고 하신 것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왕하 10:10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겔 12:28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지니 나의 한 말이 이루리라… ) (눅 1:45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말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에 그의 앞에서 모든 것은 항상 현재이다. 그렇기에 6천년 인간의 역사 (우주와 지구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통해 아담으로부터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고 죽었지만 그들 중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하는지 하나님은 모두 아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아심에도 이렇게 힘들고 부조리해 보이는 역사를 이끌어 오시는 하나님을 괴상하고 변덕스럽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혹은 우주의 역사 속에 당신의 죽음을 포함시키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판단을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신 30:15 에서는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우리 앞에는 분명 선택이 놓여있고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주님도 십자가를 질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잔’을 마실 것인가 아닌가를 앞에 두시고 몹시 괴로워함으로 고민하며 기도하심을 보여주신다.

하루를 살며 결정하게 되는 것들의 수가 적게는 몇 백에서 많게는 몇 만 번이 될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부터 5분만 더 잘까,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등등 사소한 것 또 무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들은 물론 습관적인 것 까지도 결정을 거치게 된다.

삶의 결정에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생각해 본 후에 결정하라는 말이 있다. 말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라고 한다. 성공하는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며 살고, 생각하고 결정해서 후회없는 인생을 산다고 하지만, 생각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한다.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위해서다. 그래서 많은 때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고 결과가 뻔히 보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선택한다.

이제 우리는 안다. 그래서 선택한다.

주여, 나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혹은 별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있을 때 좌절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선택하고 있는 것이고, 또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과감히 품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 중에서 십자가를 통해 적극적으로 선택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