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소라고 하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는 항상 닫혀 있다가 일년에 단 한번만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백성에 대한 대속 제사를 드렸다.  물론 그도 죄인이기에 반드시 먼저 자신에 대한 속죄를 확실히 하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주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단번에’ 즉 단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셨고, 그 피는 매년 다시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 ‘영원한’ 속죄와 증거의 피가 되신다.  (이런 증거가 있는데 아직도 계속해서 구약의 제사를 고집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로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구약의 제사는 필요도 없고 효력도 없으며 또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왜 속죄제를 드린 것일까?  물론 죄의 삯은 사망이고, 특히 구약에서는 죄를 졌을 때 그 즉시 죽임을 당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빨리 죄를 사함받아야 했고,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복이기에 속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하신 말씀도 있다.  하지만 평생 속죄제를 드려도 결국 때가 되면 모두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구약적 제사방식에 얽매여 평생을 살아야 했다. 

오늘 말씀을 다시 잘 읽어보니 14절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가 어떤 기능이 있는지 설명했다.  죽은 행실 즉 우리 삶의 전반적인 모든 비지니스와 일들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죽어 있었는데 이러한 것에 대해 우리의 양심을 씻고 궁극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먼저 정결해야 한다.  즉 피로 죄과를 사함 받아야 한다.  누가 나 대신에 죽어야 한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수학공식과 같이 들린다.  그 의미가 분명있지만 이제는 공식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공식으로 외우면 아무 감흥도 없지만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결국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 즉 당신 자신의 죽으심을 계획해 놓으셨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 분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공식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섬긴다’는 말은 ‘ㄹ라트루오’라는 말로 영어의 liturgy 즉 예배 혹은 전례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일을 뜻하는 말로 영광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만약 내가 ‘I work for the President!’ 라고 하면 어깨에 완전 힘이 들어가는 말이 된다.  아무나 대통령을 위해 일할 수 없는 것 처럼 아무나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못한다.  영광스러운 일이다.  구약시대에도 레위지파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아마도 그래서 하나님은 나실인이라는 제도를 만드셔서 비레위 지파 사람들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하셨나보다.  더우기 15절에는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며 이러한 영광이 잠시 동안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업임을 말씀한다.  몇 년 직업이 보장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보장된 영광스런 직업이다.

주님, 구약의 제사는 죄를 깨달을 때 마다 속죄를 하고 매년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지만 결국 짧은 인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인데 반해 우리에게 주어진 속죄함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끝내버리고 우리를 영원하신 기업을 얻게 하신 능력있는 것임을 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