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으로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요 9:31)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잠 15:29).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에이스) 당신의 사랑(아가파오)에 우리와 함께 서 계신다 (현재형). 그것은 바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고 ‘아직 죄인되었을 때’ 또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관계상의 문제에 직면하는 도전은 화목할 수 없다는, 즉 이제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거나 회복하기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서로간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 먼저 화친을 청해도 관계의 회복이 될까 말까인데, ‘아직’이라는 생각이 양방간에 있는 것이 큰 걸림돌이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물론이고, 하나님에 대한 죄인된 인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면 ‘나는 아직 심히 죄된 존재일 뿐이야’ 라는 생각에서 자유할 수 없다. 우리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죄인된 인간들에 대해서는 ‘너희들은 아직이야’ 라고 밖에 하실 수 없으셨다.

하지만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고, 결국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과 다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물론 그 방법은 5장 1절의 ‘믿음’을 통해서지만,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으심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만을 보자면 우리의 과거와 어제와 내 현재 형편이 어떻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더 이상 연약하지 않으며,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 되지 않는다. 만약 ‘아직’도 죄인이고 연약하고 원수됐다면 하나님과 결코 화목할 수 없다. 물론 그 전에 반드시 ‘회개’라는 것이 있고 또한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우리들 안에 평화와 화친을 가져오셨다.

주님, 혼자 떨리는 다리로 의지할 이 없이 두려움으로 서 있을 때,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으로 나와 함께 서 계심을 봅니다. 나는 심히 죄된, 죄가 가득한 존재지만, 주님께서 ‘이제’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나와 친하기 원하심을 붙듭니다. 하나님의 화목하심이 나를 회복시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