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복이다.  아무리 실력있고 integrity 가 있고 건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로 살려고 한다 해도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역부족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의 교회라는 공동체가 있다.  서로의 죄를 고하고 또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형제 자매가 있다.

다윗이 받은 복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수하에 충성된 종들을 두신 것인데, 브나야는 36절에 다윗의 말에 따라 먼저 여호와의 인정하심을 구했다.  “왕상 1:36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또 37절에서는 아직도 다윗이 살아 있는데도 그를 잇는 솔로몬의 왕위가 더 크기를 기원한다. “왕상 1:37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의 왕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왕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47절 역시 비슷하다.  물론 죽음을 앞 둔 다윗에게 그의 왕위 보다는 후계자의 안위가 더 중요했겠고 브나야와 신하들 역시 그런 상황을 간파 했겠지만, 브나야의 이런 발언은 그의 관심이 다윗 한 인물의 왕위 보다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왕국과 그 백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관심하는 것은 나와 내 가족을 넘어서 주님의 몸된 교회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나를 돌아보는 삶을 오늘 살고 있는가?

빨리 하라

왕상 1:41에는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손님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뿔나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어찌하여 성읍 중에서 소리가 요란하냐” 라고 기록하는데 당시 셀폰도 없고 전화도 없는데 앞의 모든 전개가 아도니야의 파티가 끝나기 전에 모두 일어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솔로몬이 기름부음 받고 왕이 되고 그 떠드는 소리가 아도니야의 파티까지 들린다.  그 오래 전에도 정보전은 치명적으로 중요 했나보다.  하지만 정보전의 핵심은 시간 싸움이다.  촌분을 다투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안 이상 속히 복종하는 것이 승리의 첩경이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는데 계속해서 더 말씀하시라고, 잘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나, 우리의 문제 아닌가?

후계자에 대한 예우

“왕상 1:47 왕의 신하들도 와서 우리 주 다윗 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더 아름답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다윗은 불편한 노구를 일으켜 몸을 굽힌다.  이것은 뒤 48절 처럼 하나님께 굽힘과 동시에 새로운 왕에 대한 예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왕으로서 자신의 후계자를 보는 것은 은혜요 영광이다.  더우기 이스라엘을 자신의 왕국으로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겼던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후계자를 세워 굳건히 하심을 보는 것은 그에게 큰 위로였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과는 (신 21:15-17) 다르게 다윗의 먼저 태어난 다른 아들들을 모두 제끼고 솔로몬을 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면서 ‘후계자’와 요즘 계속 문제가 되는 교회 세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 왕족이었고 왕이 될 명분이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적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후계자로 정하셨다.  ‘교회 세습’을 하는 이들의 가장 큰 ‘명목’이 자식이 아닌 다른 이들을 후계자로 세우면 교회가 갈리거나 시끄러워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다윗처럼 여호와께 맡기고 후계자에 대해 예우를 온전히 표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세워지고 오히려 귀감이 되며 모든 시끄러운 것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라면..

제단 뿔 잡기 – 미신과 믿음의 경계

50절은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았다고 한다.  아도니야는 제단 뿔을 잡는 것이 그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왕이라도 제단까지 와서 자신을 어찌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가 보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의 예상과는 아주 다르게 53절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렸다.  그리고 52절에 그의 생사는 제단 뿔을 잡는 것에 있지 않고 ‘선악’간에 심판 받을 것을 말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신칭의’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은 (롬 3, 4, 5 갈 2,3 히 11, 약 2 등등) 분명 믿음으로 의롭게 됨, 혹은 의롭게 여기심 받음을 말씀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죄성이 있고, 의롭게 ‘여기심’만 받은 것이지 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헷갈리는 이유는 그 관점이 우리에게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있느냐 같다.  깔뱅주의도 성경에는 있고, 알메니안주의도 역시 발견된다.  한번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말씀도 분명 있고, 그와는 반대로 구원받았다 해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거나 배교하면 구원을 잃는다는 말씀도 분명히 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냐 아니면 사람의 관점이냐에 따라 달려있다.  한번 구원받은 것이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므로 그가 구원하신 이는 끝까지 구원하시지만, 우리로서는 누가 정말 온전한 믿음으로 구원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이 ‘이루는’ 것 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믿는 이들 중에는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잡았던 것 같은 믿음 아닌, 오히려 미신적인 신념을 가진 이들도 있다.  내가 혹시 그러지 않은지,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고후 5:10, 요 5:29) 하나님이 아니라, 내 멋대로 믿음을 정의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운 아침이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나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이 나를 사로잡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