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세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 있던 제자들은 막 3장의 12제자 외에 나다나엘과 ‘다른 제자 둘’이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인솔로 그들은 모두 고기 잡으러 간다. 이걸 보아 아마도 빌립의 친구였던 나다나엘의 직업도 어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일곱 명이 배에 타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배와 육지 약 9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를 두고 바닷가에 주님이 서 계셨는데, 아마도 입으셨던 옷이 달랐기 때문인지 제자들은 잘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사랑이 가득한 호칭으로 ‘얘들아 (파이디온, 영어로는 kids 정도가 되겠다)’ 라고 부르신다. 요한은 후에 요한 1, 2, 3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기록하며 주님같이 사랑 가득한 말로 수신자들을 부른다.
주님은 고기가 있느냐고 물어보시는데, 이 때 쓰인 ‘고기’라는 단어는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προσφάγιον 이라는 단어로 먹을 것, 즉 ‘구운 생선’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즉 주님의 질문은 ‘고기를 잡았느냐?’ 가 아니라 ‘먹을 것이 있느냐?’ 였다. 한국인의 인사 중에 ‘밥 먹었니?’ 혹은 ‘식사는 하셨습니까?’ 라는 인사가 전에는 못살았기 때문에 했던 인사로 여겼었지만 살만큼 살게 된 요즘도 이만큼 정다운 인사가 없다. 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인사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너희들 왜 여기서 고기나 잡고 있냐? 내가 너희에게 해준 것이 얼만데? 그렇게 할 것이 없냐? 그리고 고기는 또 왜 한 마리도 못 잡았냐?’ 라고 다그치지 않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 말씀에 궁금증이 든다. 그러면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왼쪽으로만 던졌나? 그리고 배에서 그물을 던지는 것이 오른쪽으로 던지나 왼쪽으로 던지나 무슨 상관인가? 고기들이 오른쪽에만 몰려 있나?
3절의 ‘배’는 조금 큰 사이즈의 배고 8절은 ‘작은 배’ 즉 보트 정도를 뜻한다. 사이즈가 조금 큰 배 위에서 고기를 잡을 때 그 중에 리더가 있어서 그물을 내리고 올리고 할텐데, 사람들은 보통 오른 손잡이므로 아마도 리더는 자연히 그물을 왼쪽으로 던지게 했을 것이다. 요즘처럼 큰 배에서 기계로 그물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던지는 것이니 편하게 계속 왼쪽으로만 던졌던 것이다. 그런데 아침이 밝아오는 시각에 주님 말씀 따라 처음으로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다.
제자들에게 이 사건은 전에 주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부르시던 사건을 떠올리게 하며 그들의 부르심을 다시 한번 상기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이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시는데, 둘 다 상식을 깬 말씀이다. 어부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깊은 곳에 이어, 이제까지 해 왔던 방법, 그리고 편하고 익숙했던 왼쪽으로 그물 던지기를 그만 두고 이제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신다.
지난 몇 십년간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성장을 기록한 한국 교회는 이제 성장이 멈추고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저출산으로 인해 앞으로 교인 수가 확연히 줄 것이며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한다. 문제가 무엇일까? 이제까지 밤새도록 ‘열심히’ ‘왼쪽으로만’ 그물을 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본다. 하나는 ‘오른쪽’ 즉 익숙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것, 또한 동시에 ‘원래 맞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헬라어 ‘덱시오스, 오른쪽’은 그냥 왼쪽에 대한 반대 편을 말하지만, 그 어원은 ‘손으로 받다, 배우다’ 등 여러 뜻이 있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오른쪽’은 영어의 ‘ right’와 같이 ‘오른쪽’ 뜻과 함께 ‘옳다, 맞다’는 뜻도 있다. 사람들은 원래의 옳은 방법을 저버리고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방법으로 살아가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가 ‘성장’을 목표로 모든 관심을 쏟아서 이만큼 ‘성장’했지만, 그 가운데 ‘옳은 것’ 즉 주님의 방법에서 많이 떠난 것 같다. 아니, 떠났다. 주님은 ‘이제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신다. 익숙하지 않아도 ‘옳은 길 따르라’고 하신다.
또 하나는 ‘그물’에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 번역으로 ‘사람을 낚는’ 이라고 해서 ‘낚다’ 라는 말을 낚시대와 미끼로 낚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절대로 ‘미끼’를 던져 낚는 것이 아니다. 영혼 구원은 어떤 미끼로 유혹해서 낚아 채는 것이 아니라 ‘그물’로 건져 올리는 것이다. 이 그물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 net 즉 네트워크 혹은 협동을 의미한다. 그물은 서로 연결된 실이다. 날실로는 아무런 고기도 잡을 수 없지만 서로 연결되어 튼튼한 막이 되면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하지만 찢어지지 않는) 고기도 잡을 수 있다. 그렇기에 그물은 잘 보수가 되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찢어지거나 터지면 그쪽으로 고기가 모두 새어나갈 수 있다. 또 어떤 실 몇 가닥만 굵어서도 안된다. 균일하게 서로가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그물은 사람 수만 많은 모임이 아니라 소규모의 다락방 혹은 구역 모임이다. 이러한 작은 모임들 안에서 탄탄히 서로 연결되어 그물을 형성할 때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안으로 들여올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미 이런 ‘점조직’을 운영해 왔다. 그리고 '성장'했다. 그럼에도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소그룹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모이는 목적은 그 안에서 참된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자라기 위함이지 조직을 만들어서 수만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가 ‘예배’를 위해 있다고 하지만 사실 ‘예배’는 우리 삶 전체에서 나타나야지 소위 말하는 ‘주일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로 모일 때 거기에는 성도의 참된 교제가 있어야 하고 그물로 엮여야 하며 서로가 서로를 튼튼히 설 수 있게 해야 한다.
주님은 이미 빵과 생선을 준비하셨다. 제일 고마운 때가 누가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할 때다. 특히 밤새도록 고생했던 제자들에게 아침상은 얼마나 고마웠을까. 주님의 만찬에 함께 했던 제자들이 이제 주님과 아침을 먹는다. 새 날이 밝아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것들로 부터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잡은 생선도 받으신다. 제자들은 안다. 지금 잡은 153마리의 생선은 결코 자신들의 노력으로 잡은 것이 아님을. 오히려 주님께서 그들 잡은 것 중에 가져 오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에 대한 사랑과 용납으로 들린다. ‘너희가 받은 소명을 떠나 다시 고기를 잡고 있었고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만 나는 너희들을 이해한다. 용납하고 사랑한다. 지금 잡은 것들 중에 조금 가져오렴.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먹기를 원한다.’ 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주님, 제가 누리는 은혜와 또 직업 가정 모든 것들이 저의 노력보다는 주님의 선물임을 압니다. 주님과의 교제, 그리고 성도들과의 교제가 서로 더불어 먹는 친밀한 것으로 인도하시고 그 안에 기쁨과 사랑이 충만함을 보게 하소서. 이미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고 다만 주님과 함께 먹으며 누리는 것임을 압니다. 이러한 누림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튼튼한 그물로 엮이게 하소서. 그리고 이제 편하고 익숙한 것을 떠나 '옳은 편'으로 눈을 돌리게 하소서. 주님의 길을 택하게 하소서. 주님만이 길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