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두 번씩이나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다. 전형적인 히브리 인사인데, 첫번째 평강은 인사인 동시에 갑자기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기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실 것 같은데 그 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샬롬!’ 하신다. 하지만 두번째 평강은 인사 외에도 ‘보내심’에 관계있는 것 같다. 엡 6:15 에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말하는데 즉 평안의 복음을 위해서는 가야 하고 신을 신어야 함을 말씀한다. 아버지께서는 주님을 ‘아포스텔로’ 즉 파송하여 대사로 보내셨는데, 주님은 제자들을 ‘펨포’하신다. 즉 주님이 받으신 것과 동일한 것을 ‘짊어 주신’다. 그리고 이 ‘펨포’를 위해 성령을 주신다.

처음으로 성령 받는 제자들

성령 받는 구절은 사도행전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주님 부활 후 주님께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고 하신 이 때가 처음이다. 이 때 제자들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이미 받는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역을 위해 능력으로 위에서 임하는 성령을 받는다. 같은 성령을 받는 것이지만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생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사역을 위함이다. 마치 구약에서 다윗이 세번이나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이 생각난다. 첫 번째는 가족들만 알았던 명분 상의 기름 부음 이었지만 두 번째 세 번째는 점진적으로 온천하에 공개되는 기름 부음이었다. 성령 받는 것도 이번이 처음,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에게 불같이 내리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세번째로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임하신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하는 권능을 받았다. 마치 주님의 제자들은 누구의 죄는 사해줄 수 있고 다른 이들의 죄는 그냥 둘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것 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권위의 원천은 성령이시다. 이미 주님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 주님을 믿기만 하면 죄는 사함 받는다. 즉 이 ‘누구의 죄든 사한다’는 의미는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고, 성령의 능력 아니면 주님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때 누구든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그대로 두면 (전하지 않으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과 비슷한 것으로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의 구절이 있는데, 원어를 잘 살펴보면 ‘매일 것이요’와 ‘풀리리라’ 부분이 영어로 하면 ‘shall be having been…’ 으로 나온다. 즉 내가 땅에 무언가 매어서 그 결과로 하늘에서 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땅에서 무언가 매는 것은 하늘에서 매어와 진 것으로 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즉 내가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나는 단지 쓰임 받는 것이다. 죄를 사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주체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체이시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만 사용되어 진다.

만지지 (붙들지) 말라 vs. 넣어 보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했던 주님께서 8일이 지난 후에 도마에게는 만지는 것을 넘어 아예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도마는 그러지 않았고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주님의 이 말씀은 남녀차별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하지만 말씀을 잘 읽어보면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추론해 보면 주님께서는 이미 지난 8일 동안 아버지를 뵙고 오셨다는 뜻이 된다.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사건은 반드시 ‘승천’이 될 필요는 없다. 사실 요한 복음은 주님의 승천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다. 20장은 ‘안식후 첫 날’로 시작하는데, 이제까지는 ‘안식일’이 중요했지만, ‘안식후 첫 날’ 즉 새로운 시작을 말씀하시고, ‘8일이 지난 후’ 즉 노아의 8명 혹은 8일 만의 할례 등에서 ‘새로운 시작’의 뜻인 8이라는 숫자를 일부러 쓴 것으로 이 부활 후의 사건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임을 말씀하신다.

주님을 믿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조건들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 후 주님을 처음 봤을 때 도마가 없었기 때문에 도마는 의심을 하는데 그 의심에는 세가지 조건이 있다. 이 세 가지 모두를 충족시켜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고,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봐야겠다고 한다. 점점 더 큰 확증을 요구한다. 주님을 믿기 위해,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끔 이런 시험을 해보려는 유혹이 생긴다. 먼저 내가 좀 더 영적으로 육적으로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가정이 모두 뛰어나고, 적어도 백만 장자쯤 되게 해주시면 주님이 참 신인 것을 믿을 수 있겠다… 이것은 사역에 대한 태도도 비슷한데,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많은 지식과 뛰어난 인품과 효과적인 처세술이나 원만한 인간관계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섬기는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비로서 주님을 섬길 수 있고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물론 사역은 거룩한 것이기에 죄에서 떠나야 하며 인품도 성숙해야 하며, 실력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이 모든 조건들의 필요는 사라진다. 단지 주님만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 하셔도 그러한 조건들은 이제 별 의미가 없어진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은 잘 먹고 잘 살거나 멋진 사역을 이루거나 나의 능력으로 주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기록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도마와 함께 보지 않고 믿는 우리도 고백한다. 예수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요한 복음 기록의 목적

앞의 언급처럼 요한은 이 기록의 목적이 사람들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원어로는 ‘믿고’가 ‘믿어야 하며’ 로 되어 있고, ‘믿음으로 그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중요하고 또 목적이 될까? 내 꿈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종교를 새롭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정치적 안정이나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사는 기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그리고 ‘그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예수’께서 역사적 인물이며, 그 인간 예수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즉 온전히 신성이 있는 분이며, 또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 구세주 즉 구약에서 계속 예언한 성경의 핵심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라는 이름 외에는 다른 것, 다른 방법, 다른 구원이 없다는 것이고 (행 4:12) 그 이름 안에서 만물이 통일 됨을 뜻한다 (엡 1:10). 또한 그 이름 안에서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이다.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리고 믿음으로 그 이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인 ‘zoe’를 얻는 것인데, ‘얻는’ 이라는 단어는 원형이 ‘에코’라는 단어로 ‘얻다, 갖다, 잡다, 연합하다, 소유하다’ 등의 뜻이다. (영어의 메아리를 뜻하는 에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른 단어 hxo임)

주님,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이 현실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고 그냥 보기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 집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주의 비밀이며 삶의 의미이고 목적임을 봅니다. 요한이 전한 좋은 소식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그 이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