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무덤에 있을 동안 그 몸을 감쌌던 수의가 발견됐다며 연대를 측정해보니 주님 죽으셨던 때가 맞다고 하면서 수의가 진품이라며 열을 올린 기사가 계속해서 지난 몇 년간 올라왔었다. 그런데 아무리 믿음을 위한 것이라지만 의구심이 들면서 그 수의는 가짜고 거짓말 하는 (lie) 것이라는 생각이다. 성경을 원어로 보는 것은 꽤 도움이 되고 재미있는데, 수의를 기록한 책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둘 뿐이고* (밑에 보충 설명) 모두 복수를 썼다. 즉 수의가 아니고 수의들 (oqonia)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처음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 몇 개의 천이었는데, 그것들은 무덤에 누워 (혹은 ‘놓여’ lie) 있었다. 사람들이 억지로 만든 천 조각은 하나로 길게 이어져서 비성경적임을 나타내며 거짓 (lie) 임을 스스로 말하지만, 주님의 부활하심을 증명하는 몇 개의 천 조각들은 무덤에 ‘놓여 (lie)’ 있었다. 진리를 위한다고 거짓을 말하면 안된다. 진리는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사모함: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길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서 빈 무덤을 보고 나서 믿었지만 그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부활하신 직후의 주님을 뵙지 못한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계속 무덤에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주위를 멤돌다가 다시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 천사 둘을 발견한다. 두 제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는데도 천사들을 보지 못했는데 마리아에게는 천사들이 나타났다. 그 차이는 아마도 마리아의 사모함이 제자들의 그것을 능가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를 사랑하면 계속 함께 있고 싶고, 찾고 싶고, 가까이 있고 싶고, 그가 이미 떠나서 없는 집이나 장소에서도 맴돌게 된다. 마리아는 이러한 사모함이 있었기에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음성, 즉 첫번째 부활의 메시지를 (눅 24장) 들을 수 있었다.
막 16:9에는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라고 기록하며 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말하는데, 과거 ‘일곱 귀신’ 들렀지만 깨끗하게 해주신 여자임을 밝힌다. ‘일곱 귀신’하면 마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는 구절을 떠 올리게 되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깨끗게 된 후 그의 삶이 정리 정돈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온전히 나음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눅 7:47 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은인이었고 모든 사랑을 부어드릴 만한 분이셨다. 자신의 삶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사모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사모함은 15절에 절정을 이룬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를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이 ‘가져가다’의 단어는 ‘아로’라는 말로 ‘들다, 짊어지다, 옮기다’의 뜻이다. 그만큼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 묻어나온다. 이러한 사랑으로 마리아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신 그 이름으로 기록된다. ‘마리아야’ 라고 부르신 주님은 17절에 아직 아버지를 뵙지도 못한 이른 시간에 이미 마리아와 교제하신다. 이러한 영광을 마리아는 누린다. 후에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서 인터뷰하고 싶다. ‘그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
호칭을 고치시는 주님
그런데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호칭이 좀 신기하다. 처음에 동산지기로 알았을 때는 ‘주 kurie’라고 하다가 주님께서 자신을 밝히시자 ‘랍오니’ 즉 문자적으로 ‘교사,’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즉 전에 주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고 계속해서 ‘선생님’이라고 불러왔던 것 같다. ‘주’가 더 친근한 말인지 ‘선생님’이 더 친근한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 역시 주님의 제자였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붙들지 말라’ 라고 하시는데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붙들다’는 단어는 ἅπτομαι로 ‘만지다, 붙들다, 붙어 있다’ 등의 뜻인데, 그 의미 중 하나는 남녀의 육체적 관계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가 부적절한 것으로 엉뚱하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호칭으로 알 수 있고, 더우기 바로 다음 주님의 말씀으로 정확히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다. 바로 15장에서 제자들을 더 이상 ‘제자’로 말씀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는데, 부활 후에는 더 가까워져서 동일한 ‘생명’을 소유한 ‘형제’ 즉 아버지가 같고 하나님이 같은 형제들로 대하신다. 주님의 부활은 ‘사람이신’ 예수가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부활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님을 형제가 되게 한다.
물론 제자들은 후에도 계속해서 주님을 주라고 부른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 하나님으로서, 또 맏아들로서 주님 자신은 우리가 주님의 형제들임을 말씀하신다. 우리의 호칭을 바꾸신다.
주님, 주님의 구원하심은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이 구원은 죄인된 우리가 주님의 형제까지 높여지게 하는 놀라운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처럼 부지런히 사모하지도 않은 나에게도 동일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생명을 귀히 여기고 계속 새롭게 경험하며 배우게 하소서. 주님의 부활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 필요합니다. 내 안에서도 부활하시고, 그 능력으로 살게 하소서.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단수의 '신돈'이라는 세마포를 말하고 있고, 누가 요한에 복수로 나오는 수의는 '오또니온'이라는 단어로서 '천 조각들'이라는 단어임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을 싸맬 때는 단수였는데 아마도 부활하시면서 찢어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