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는 식물학적으로 잎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창세기 아담의 범죄로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정상적인 잎은 넓고 부드러워서 광합성을 하는 기능이 있지만 이러한 정상적인 잎으로 ‘성장’ 하지 못하고 뾰족하게 굳어버린 것이 가시이다. 가시는 광합성의 기능도 할 수 없고 단지 ‘찌르기’만 하며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결국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구속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런 것 같다. 그리고 용서 받았지만 그 안에 온전한 용서의 깨달음이 없고, 날마다 그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면 어느새 가시가 나오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가시가 변하여 잎이 되어 하나님의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여 주위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를 만지시는 주님의 은혜다. 주님 나를 만지소서!
마태복음 27장 같은 내용에는 주님이 ‘홍포’를 입으셨다고 하는데 마가복음과 오늘 구절에선 ‘자색 (보라색) 옷’을 입었다고 기록한다. 왜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원래 군병들이 준비한 옷은 자색 옷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점을 비웃기 위해서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박았던 것 처럼, 그들은 왕족들이 둘렀던 보라색 천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채찍질로 피가 많이 흐르게 되자 이 옷이 ‘홍포’가 되었다. 아니면, 그 순서가 반대일지도 모른다. 원래 홍포였지만 피가 많이 묻고 굳어서 검은 색으로 변하여 전체적인 색깔이 자주색 같이 변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두가지 색은 서로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주님의 고난을 의미하고 있어 마음이 아리다.
병정들은 주님을 치며 ‘평안할지어다’ 라고 하는데, 이 ‘평안’ 이라는 단어는 χαίρω 라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다’ 혹은 왕에게 ‘만세!’ 라고 외치는 단어다. 즉 ‘샬롬’과는 다른 단어이다. 로마인들이 ‘시이저 만세!’ 하던 바로 그 ‘만세!’이다. 우리는 ‘만세!’가 아니라 ‘영원히 있사옵니다!’라고 주님께 고백한다. 그들은 주님을 농락했지만 우리는 주님을 경배한다.
빌라도의 두려움과 종교적 배경
빌라도가 경험한 두려움의 원인은 몇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그의 종교적 배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대인들이 겁없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은 유일하고 거룩하시다는 신관, 즉 신과 인간은 별개라는 관념이 있는 반면 로마 출신의 빌라도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적 배경 즉 다신관 그리고 반신반인 신관 때문에 그 앞에 힘없이 잡혀온 인간 예수를 다르게 인식해 볼 수도 있는 이해가 있었다. (물론 주님은 반신반인이 아니다) 이것은 빌라도에게는 두려움의 원인이 됐지만, 그러한 배경은 오히려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를 알려는 관심보다 소요를 안정시키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관심이 더 컸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라고 말씀하신 것 처럼 그 자신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에서 ‘자’는 단수이다. 즉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치는 대제사장들과 하수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를 말씀하시는 걸까? 생각해보니 빌라도를 바로 전에 넘겨준 ‘가야바’라는 인물이 있다.
교회 내의 소송들
가야바는 대제사장들과 하수들이 요구하는대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로마의 통치를 받았던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리가 없었기에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세력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 안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외부의 힘을 빌린다… 이런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관철 시키려는 때가 많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내에서 교회끼리 혹은 교회 안에서 서로 소송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교회가 갈리거나 교회끼리 소송할 때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 백성이라는 고귀한 위치를 떠나 오히려 세상 법 아래 자신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심각한 것이기에 바울은 고전 6장에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노라. 너희 가운데 현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냐? 자기 형제들 사이에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한 사람도 없느냐? (6) 그래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고소하러 가며 그것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그러므로 이제 너희 가운데 소송 사건이 있다는 것이 이미 너희 가운데 엄연한 허물이 되나니, 차라리 불의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오히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되 너희 형제들에게 하는도다. (9)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바울은 형제끼지 소송하는 것이 ‘불의’한 것이며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차라리 손해를 보라고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끼리 서로 소송하는 것은 주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것보다 더 죄가 중하다고 할 수 있다.
가야바는18:14절에 주님의 구속사적인 죽으심에 대해 예언한 인물로서 그리 부정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어쩌면 이런 예언적인 언급을 하고도 주님을 넘겨준,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한 후에도 주님께 꾸중을 들었던 것 처럼 가야바는 결국 주님을 넘겨준 사람이 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인물은 가야바라는 한 인물로 국한 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유대인 전체를 한 인물로서 말씀하고 계시는 지도 모른다. 사실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속하지 않는 온 인류를 ‘아담’ 혹은 ‘첫 사람’ 즉 단수로 말씀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 (고전 15:45)’ 이고 동시에 ‘둘째 사람 (고전 15:47)’ 그리고 ‘새 사람 (엡 2:15)’ 이시다. 그렇기에 아담에 속하여 예수를 ‘넘겨준 자’의 죄는 마땅히 사형 선고를 받는다. 답이 없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모두 죽고 새로운 한 새 사람, 둘째 사람으로 태어난다.
주님, 전개되는 상황은 어수룩하지만 주님의 구속사역은 얼마나 치밀한지요. 전혀 희망없는 온 인류를 온전히 구원하시고 하나로 만드시는 주님의 능력있는 구속을 봅니다. 오늘 저를 만지시고 주님의 온전히 용서하심을 다시 바라보게 하시며 내 안의 어두움에 빛 비추시고, 나와 주위를 찌르는 가시가 변하여 주님의 빛을 온전히 받는 푸른 잎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