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전도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전했던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한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것이었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죄로 뭉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으로, 나는 물론 다른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었다. 하지만 후에 돌아보니 부활에 대해서는 별로 전했던 것 같지 않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활 사건은 주님의 죽으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부활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죄로 인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또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당신의 의를 나타내시고, 동시에 믿는 이들에게 동일한 부활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 16절 그리고 이하 말씀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라는 구절의 ‘본다’는 단어는 한국어도 영어도 모두 ‘보다’ 혹은 ‘see’라고 번역됐지만 헬라어는 두 가지 다른 단어가 쓰였다.
첫번째 ‘보다’는 θεωρέω 라는 단어로 ‘바라보다, 똑바로 보다, 정신적으로 바라보다, 분별하다, 눈으로 보다, 찾다’ 등의 여러 뜻이 있고, 두번째 ‘보다’는ὀπτάνομαι라는 단어로 ‘눈으로 보다, 나타내 보이다' 등의 간단한 뜻이 있다. 즉 두번째 단어 앞부분 opta라는 것을 보면 신체적인 ‘눈’ 의미가 많이 있고, 실제적으로 보는 것이며 또한 볼 수 있게 ‘나타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조금 해석해서 번역한다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찾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내가 나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말씀은 7장 34절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나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라고 하신 말씀처럼 주님의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나타내 보일 것이다’라는 부분은 당신의 부활에 대해 확신 가득한 선포이기도 하다.
십자가를 앞에 둔 주님은 죽음에 대해 당신의 온전한 인성 때문에 두려움과 갈등도 있었겠지만 분명한 것은 부활에 대한 확신만큼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물론이고 당신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미리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 처럼 조금도 의심이 없으셨다.
어제 밤에도 부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나는 부활을 믿고 있는가? 마르다 처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 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데 오늘 말씀의 전반부가 부활을, 후반부가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얻는 기도의 응답을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기도 응답과 부활 신앙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진정 부활을 믿는다면 나의 기도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즉 기도는 부활 신앙 없이는 힘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것인데, 전에는 예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예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도 또 주님에게도 직접적으로 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침례)를 주고…’ 라고 명하셨지만 제자들은 후에 세례 (침례)를 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라고 했던 기록은 없다. 오히려 ‘예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었다 (행 2:38, 8:16, 10:48, 19:5). 제자들이 잘못을 범한 것일까? 아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다. ‘이름’은 단수로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나에게 의와 생명과 능력과 기도의 응답이 되시는 예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