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절: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마리아에 대해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라고 설명하지만 이 사건은 다음 장 12장에 나온다. 아직 나오지 않은 사건에 대해 이미 지난 일처럼 말하는 이유는 뭘까? 요한복음을 처음 읽게되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흥미를 가질 것이고, 그 외 복음서를 이미 읽어본 사람들은 그 내용에 대해 이미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요한복음의 전개상 이러한 순서가 더 좋았나보다. 11장 전체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말하는데, 이 후로는 모두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을 기록함으로 12장 처음 마리아의 향유 붓는 이야기를 끝으로 무언가 사건에 대한 기록은 끝난다.
3, 5절: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님께서 나사로를 사랑(아끼는, φιλέω 필레오)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5절에서 주님은 그들 모두를 '아가파오'하셨다. 필레오하실 것 같은 우리의 예상은 주님이 이틀을 더 머무시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가파오 하시는 주님을 만날 때 우리로 죽음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를 알게 하신다. 죽음없이는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을 경험하게 되면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9절: 유대인의 시간은 낮과 밤을 각 12시간으로 나누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12시간, 해가 지고 난 후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밤 12시간이었다. 그래서 밤과 낮의 길이가 바뀌면 역시 시간의 길이도 바뀌었다. 반면 로마시간은 지금 우리 시간과 마찬가지로 정오부터 자정까지 12시간, 또 자정부터 정오까지 12시간이었다. 주님은 '낮 12시간'을 말씀하시며 '세상의 빛' 바로 주님 자신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낮이므로 실족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11절: 믿는 이들의 죽음은 사망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잠들었다'의 단어 어원은 '눕다, 장사지내다'의 뜻이 있는데, 주님은 깨우러 가신다.
14절: '죽다'라는 단어는 ἀποθνῄσκω인데 처음 '아포'는 '분리'를 뜻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3장 16절 '멸망'과는 다르다. '멸망'은 '아폴루미'이다. 주님을 믿어도 아포뜨네이스코는 경험하지만 아폴루미는 경험하지 않는다.
16절: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가 나오는데, 이 '디두모'라는 단어의 뜻은 '쌍둥이'다. 아마도 별명같은데 누구와 닮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도마가 주님의 쌍둥이 형제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말도 안돼는 것임을 안다. 아마도 외적으로는 주님을 닮은 제자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주님을 외적으로는 닮아서 쌍둥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이것은 완전히 내 생각) 오늘은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라며 호통쳤지만 그 내면은 불신과 열등감이 있던 제자같다. 바로 나의 모습 아닌가... 믿는이의 모습이고 말로는 장담하는 신앙인이지만 내면에서는 갈등하고 염려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까지 주님은 아가파오 하신다.
주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아가파오 하심을 믿습니다. 저보다 더 저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죽음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부활을 위해서임을 바라보게 하소서.
(방글라데시 단기선교 참석 관계로 앞으로 두주간은 큐티 나눔이 없을 것입니다. 방글라데시에 주님의 빛이 비추시고 영광이 드러나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