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장소를 옮긴 새로운 사건이 아니고 9장의 연장이다.  뒤의 19절과 21절을 보면 계속 유대인과 맹인에 대해 나오기 때문이다.  눈을 뜨는 문제와 보는 문제의 연장에서 양의 우리를 말씀하시고 그 외의 많은 것을 말씀하신다.

우선 1절과 8절에는 도둑놈과 강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양의 우리, 즉 당시 집 옆에 울타리를 쳐놓고 양이나 가축을 기르던 곳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는 이들은 도둑놈이고 강도며,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8절에는 ‘나보다 먼저 온’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주님보다 먼저 태어난 부처나 공자 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구약의 마지막 책이 쓰여진 후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공백기 동안 나타났던 몇몇 민족 지도자들을 가리키시는 것 같다.  (모세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모세를 읹정하셨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 400년 동안 일어났던 몇몇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였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때 활동하던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 남다르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고 열심히 봉사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도둑이요 강도’라고 하신다.  주님은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주님의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주님이 오신 이유다.  그래서 양의 합법적인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여러 예언을 성취함에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다. 

양은 그 생명에 따라 본능적으로 목자의 음성을 안다.  동시에 진정한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알고 그 상태와 필요를 아신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서 우리 밖으로 인도하면 양들은 그 목자를 따른다.  하지만 목자가 아니면 양들은 도망친다.  이단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는데 이단들 자체도 문제지만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역시 문제다.  양이 아니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고, 미혹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욕심 특히 영적 교만으로 망하고 만다.

주님은 목자인 동시에 양의 문이시다.  그래서 그를 통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주님 ‘안으로’ 들어와야 생명의 말씀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 아닌가?  ‘들어가며’는 이해가 되는데 ‘나오며’는 무슨 뜻일까?

그래서 원어를 살펴보니 이해가 간다.  ‘들어가며’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 ‘들어오며’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εἰσέρχομαι 라는 단어는 계속 나오는 단어인 ‘에이스’와 ‘에르코마이 (오다)’의 합성어로 ‘안으로 오다’의 뜻이다.   ‘나오며’ 라는 단어는 잘 번역됐는데 ‘에크 (밖으로)’와 ‘에르코마이’의 합성어로 ‘밖으로 오다’이다.  즉 이 말은 주님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주님 밖으로 나오는 것 혹은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주님을 잘 믿다가 언제는 또 잘 믿지 않는 들락날락 들쑥날쑥이 아니라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든지 밖으로 나오든지 모두 주님께로 ‘오는 것’이다.  즉 교회로 모이는 것도 주님께 오는 것이고 흩어진 교회로 사는 것도 역시 주님께 오는 것이다. 

구약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며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말씀 즉 주님의 임재가 있으면 복을 받고 누리고 또한 복의 전달자가 됨을 말씀한다.  그래서 이 들어오며 나옴을 통해 생명의 꼴을 찾게 되는데, 이 말은 종교적인 모임만을 통해 소위 ‘은혜받고’ 복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과 임재하심이 우리 삶 전체에 있을 때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는 것이다.

주님 주시는 영원하신 생명은 단지 소유하는 것 뿐만 아니라 ‘풍성히’ 소유할 수 있는데, 이 ‘풍성히’라는 단어 περισσός 는 내게 '딱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차고 넘친다'는 말이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하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는데, 바로 내 잔이 넘치는 것, 즉 내가 써도 다 쓰지 못하는 필요이상의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다 쓰지 못하는 필요 이상의 풍성이 있다는 말씀은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아침에도 나눈다.  주님의 말씀이 넘쳐 흐를 때 나의 사회적 혹은 종교적 지위와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나눌 수 밖에 없다.  그래야 더 넘친다.  마치 젖소가 우유를 생산할 때 계속해서 짜야, 그 넘침을 공급해야, 더욱 넘치는 것과 같다.

주님, 이 아침에도 주님의 생명이 풍성함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지식만이 아니고 꼴을 얻게 하고 풍성히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나누게 하시는 그런 공급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공급이 나를 통해 흐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쓸 것 그 이상을 주심으로 나눕니다.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