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논란에 분명 닭이 먼저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닭이 없이는 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닭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그 종류대로 창조된 만물 중의 하나다.

그런데 '보다'라는 단어와 '눈'이라는 단어는 어떨까? 눈이 있기 때문에 '보다' 라는 단어가 생겼을까 아니면 '보다'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눈'이 있을까? 언뜻 생각하기에 눈이 있기 때문에 '보다'라는 단어가 있을 것 같지만 재미있게도 헬라어는 그 반대를 말한다.

우리 말에도 '어원'이 있는 것들이 많지만 헬라어에는 많은 것들의 그 근본되는 단어들이 있어서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ὀφθαλμός' 오프딸모스 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ὀπτάνομαι 오프타노마이 즉 '보다'라는 동사이다. 즉 헬라어는 '보다'라는 단어가 '눈'보다 먼저임을 알려준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9장 거의 전체에서는 오프타노마이 보다는 19절의 '블레포'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는데, 이 단어는 육체적인 눈으로도 보고 동시에 마음의 눈으로도 본다는 뜻이 있다. 즉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마음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εἴδω'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많이 쓰였는데 그 것은 '인식하다'의 뜻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노젖고 가는 모습을 멀리 산에서 보실 수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말에도 '본다'는 말이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많다. 귀로 '들어 보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코로 '냄새 맡아 보고' 마음으로 '느껴 본다'. 생각을 추려 보기도 하고 사람을 달래 보기도 한다. 무엇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기다려 보기도 한다.

이렇게 많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온전했던 주위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에 대해 마음을 닫았기 때문에 이 맹인이었던 사람에 비해 오히려 눈뜬 장님들이었다. 글을 모르면 눈뜬 장님들이라고 하지만 글을 알아도 참된 로고스이신 주님을 모르면 정말 맹인들이다.

에베소서 1장 18-19절에는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 눈을 밝히실 때 알 수 있다.

주님, 주님 주시는 눈으로 보게 하시고, 마음 눈이 밝혀짐으로 주님을 온전히 보게 하소서. 세상이 이제까지 나에게 강요했던 돗수도 맞지 않는 색안경을 벗고 주님 주시는 안약을 바르게 하소서. 시원한 안목을 갖기 원합니다. 주님 바라 보시는 것을 보게 하시고 또 하늘 보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