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주님의 공로 아니면 죄라는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신 시절 어떤 민주 투사는 감옥에만 들어가지 않았지 밖에서 자유로운 것은 담배 피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고백에, 과연 민주 투사들만이 느꼈던 것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민주 운동을 하며 잡혀갔던 많은 사람들과 숨어 지내던 사람들, 그리고 사회적 억업과 차별 속에 사방이 막혔던 사람들은 물론, 죄의 모든 굴레에 갖혔지만 자신들은 감옥에 갇혀있지 않다는 이유로 자유롭다고 여겼던 사람들 역시 삶은 생노병사 모두 죄의 결과이다.  다윗은 모친이 죄 중에 자신을 잉태했다고 하며 태어난 것 조차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했다.

그런데 주님은 자유를 선포하신다.

보통 32절 말씀 하나만 요절 말씀이 되어 ‘진리를 알면 자유한다’ 로 이해하는데, 이 자유를 얻으려면 바로 앞 구절을 읽어야 한다.  원어에서는 ‘kai’를 써서 두 문장을 연결해 준다.  즉 31절 주님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함으로 먼저 ‘주님을 믿음’이 우선되어야 하고,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즉 주님을 믿고 주님 말씀 안에 거하면 제자가 되는데, 그 후에야 바로 진리를 알게 (기노스코, 주관적 앎) 되고 그 진리가 제자된 이들을 자유롭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진리를 알찌니’의 진리는 목격적인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진리는 주격이다.  둘이 같은 단어지만 앞은 ‘알레떼이안’ 뒤는 ‘알레떼이아’ 이다.  영어로 하면 그냥 truth인데 한국어가 ‘를’의 조사를 써서 목격적임을 잘 나타내 준다.  즉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알다’ 라는 단어지만 그 목적은 ‘진리’이다.  참된 것이 아닌 것을 아무리 알아도 자유를 얻지 못하지만 참된 것을 알면 자유함을 얻는다.

그 진리는 바로 주님이시다.  빌라도가 주님을 앞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던 것 처럼 사람은 주님을 알지 못하면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진리를 알 때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진정한 자유가 가득한 하나님 나라 (바실레이아, 왕국)으로 인도하는 웜홀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언약의 자손’ 이고 ‘믿음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모세 이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십계명 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음을 부인하고 언약에서 떠나 율법만을 숭배하며 그 안에서 속박받았다.

여기서 울타리라는 개념이 생각난다.  영어로 boundary라는 단어는 울타리 혹은 경계라는 말인데 이것은 한면으로는 경계, 구분 등을 말하지만 동시에 속박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울타리 밖으로는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울타리는 보호의 뜻이 강한데, 밖의 악한 것들로 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행함으로 지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기고 그것을 의지하게 되면 그 울타리는 속박이 된다.  진정한 울타리는 주님이시고 그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주님의 울타리는 온 우주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dominion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는 남의 나라 국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소유된 지경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dominion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셨는데, 대화가 갈수록 그들이 정말 주님을 믿었는지 궁금하다.  결국 주님은 그들이 마귀에서 났음을 폭로하신다.  나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속에 주님 외의 것이 얼마나 많고 내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이 드러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믿는 사람인가…

주님, 신자되게 하소서.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사오니 나에게 믿음 주소서.  머리만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의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거하게 하시고 진리를 알게 하소서.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 무한한 자유함이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