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보통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하마르티아 라는 원어에서 쓰인 단어는 ‘빗나가다’ 혹은 ‘잃어버리다’ 등의 뜻이다. 즉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고 빗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쁜 짓을 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을 떠나서는 방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헤매다 죽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착하게 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주님의 대화는 민망할 정도로 직설적이다. 그래도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인데 좀 돌려서 ‘너희들이 이렇게 하면 멸망당한다. 날 좀 믿어줄 수 없겠니?’라고 해서 설득을 하면 좋을 것도 같은데 대화법이 오히려 사람들을 동요하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줄 것 같이 들린다.
그런데 부드러운 대화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고 딱딱하게 말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할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정말 딱딱하게 말씀하셨을까? 문자로만 되어 있으니 알기 쉽지 않다…
24절은 해석에도 나왔지만 ‘내가 그’라는 말이 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여쭤볼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 אֶהְיֶה אֲשֶׁר אֶהְיֶה (아혜 아셔르 아혜)’라고 하신 말씀이다. 즉 영어로 I Am 인데, ‘내가 그’에서 ‘그’라는 단어는 원어에 없지만 그냥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더욱 주님 자신을 I Am으로 볼 수 있게 요한은 기록했다. 더우기 25절에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라고 말씀하는데 ‘처음’이라는 단어는 1장 1절 ‘태초’와 같은 단어이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다. 즉 주님은 태초부터 말씀해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본체시다.
8장을 찾아보면 I Am이 몇 번 더 나오는데, 조금 앞절 12절의 ‘나는 세상의 빛이라’ 역시 ‘에고 에이미’이고, 18절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 이다’ 역시 ‘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 이다. 그래서 18절을 I Am으로 해석하면 ‘I Am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위해 증언하신’ 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바로 뒤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와 연결되는데, 그렇게 연결해서 다시 읽으면 ‘I Am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위해 증언하신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는 나에 대해 증언하신다’ 이다. 즉 주님께서 자신을 증언하시지만 동시에 아버지께서 증언하시고, I Am이 하신다. 재미있는 언어유희 같다.
28절 ‘내가 그인 줄을 알고’ 역시 I Am이다. 그래서 그냥 해석하면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리고 난 후에 너희는 내가 그인줄 알리라’ 지만, I Am으로 해석하면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리고 난 후에 너희는 I Am을 알리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oti라는 접속사가 있어서 ‘그’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계속 희한하게 ‘그’라는 단어를 일부로 쓰지 않는다. 주님이 바로 I Am, ego eimi, '아혜 아셔르 아혜' 시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30절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하시자 많은 이들이 주님 안으로 믿었다.’ 주님이 I Am이심을 계시하시고 사람들은 주님 안으로 믿었다.
주님, 힘있는 그 위대하신 I Am 을 바라봅니다. 주님은 태초부터 말씀해 오신 ‘에고 에이미’ 이십니다. 능력의 I Am을 붙잡고 그 안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