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36에서 주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많은 표적으로 보여주셨음에도 사람들은 의심했다.  또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을 계속 하셨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6:69 에서는 제자들이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20:29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시며 ‘믿음’과 ‘보는 것’이 항상 같이 있는 것은 아님을 말씀하신다.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보게되는 것은 대부분 진짜라고 믿게 되지만 우리의 시각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착시현상은  우리가 보는 것이 대부분 우리의 뇌가 ‘해석’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믿음이 먼저고 믿게 될 때 비로소 알게된다.

오늘 말씀 여러 곳에서 눈에 띠는 단어가 ‘알다’라는 단어다.  헬라어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알다’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안다. (ㅎㅎ)  하나는 ‘기노스코’라는 단어로 주관적인 경험으로 알고 습득하여 이해한다는 뜻이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의 말씀에서는 ‘인정하다’의 뜻도 있다.   또 하나는 ‘에이도’ 라는 단어로 ‘보다, 인식하다, 알다’ 등의 뜻이 있다. 

먼저 기노스코 알다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26절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즉 ‘인정하다’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27절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즉 주관적으로 안다는 뜻이다.  어찌보면 그들의 고백이 맞는 것 같다.  주님의 성육신은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에이도’가 쓰인 구절이다.

26절에는 ‘기노스코’도 있지만, 처음에 ‘보라’ 라는 단어는 ‘에이도, ide’이다.

27절 역시 ‘기노스코’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에서는 ‘에이도’가 쓰인다.  마치 유명인을 아는 것 처럼 이들도 주님을 알긴 알았다.

28절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또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모두 ‘에이도’이다.  주님에 의하면 그들은 주관적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면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주님께서 나사렛 출신임을 알았지만 베들레헴 태생인줄은 몰랐다.  더우기 주님의 근본적인 출신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29절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즉 주님이 주관적인것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아버지 하나님을 아신 이유는 바로 그에게로부터 ‘함께 오셨기’ (para) 때문이다.

주님, 소위 ‘성화’라는 그림을 보고 주님을 안다고 하고, 영화를 보고도 주님을 안다고도 하고, 성경을 읽으면 주님을 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계시면, 또 주님께서 나를 인정하지 않으시면 결코 아는 것이 아님을 또한 압니다.  모세를 이름으로 아신 주님께서 매일 부지런히 주님을 찾고 주님을 알기 원하는 모든 이들의 이름도 알아주시고 더욱 주님을 알고 경험하게 은혜내려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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